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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훈 기자의 사람 속으로] ‘惡’器가 판치는 사회 스트라디바리를 꿈꾸다 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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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기업인 노신사의 악기 고쳐주며 신뢰 쌓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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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는 타고난 눈썰미와 손재주 덕분에 눈치코치로 7학기 만에 졸업해 디플로마(Diploma)가 됐다. 졸업작품으로 학생들은 대부분 바이올린을 택했다. 하지만 그는 첼로를 만들었다. 첼로는 크기도 그렇고, 시간이 2배나 들어 다들 기피하지만 본때를 보이고 싶은 마음에서 그는 첼로를 선택한 것이었다.

졸업작품까지 바이올린 3대, 비올라 1대 등 모두 5대의 악기를 만들었다. 졸업하고 나니 악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감이 넘쳤다. 1987년 졸업하자마자 은행에서 1만 달러를 빌려 현악기 전문상점(Chicago Stringed Instruments)을 차렸다. 미국을 통틀어 아시아 출신으로는 최초였다.

당시 시카고에도 현악기 전문점이라고는 네 곳밖에 없을 때였다. 제작 기술도 조금 더 붙어 바이올린은 한 달, 첼로도 한 달 보름이면 완성할 수 있었다. 곧 꿈이 이뤄질 것 같았다. 하지만 기대가 산산조각 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밤을 새워가며 만든 악기의 소리가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졸업식에서 “바이올린 제작에 걸음마를 뗀 것일 뿐”이라던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실감났다. 집세와 융자금 이자는 어쩌나. 초조와 불안 속에 몇 개월이 훌쩍 지나갔다. 궁(窮)하면 통(通)한다고 했던가? 어느 날 한 동포 노신사가 그의 가게를 찾아왔다. 노신사는 허름한 바이올린을 몇 대 들고 와서 손봐달라고 했다.

한푼이 아쉬운 터에 얼마나 고마웠는지 싼 값에 성심성의껏 수리해줬다. 정성이 통했던지 노신사는 이후에도 계속 찾아왔다. 노신사는 1950년대 초까지 한국에서 가장 큰 기업을 경영했던 원로 기업인이었다. 한 달 평균 30여 대씩 400대쯤 수리해줬다. 처음에는 간단한 것에서부터 점차 심도 있게 손볼 것들이었다.

나중에는 갈리아노·상투스세라핀·루뽀·비욤·강드 등 명기도 40여 대 가져왔다. 근처에서 악기 수리점을 하던 첸이라는 중국인 친구가 찾아와서는 “너는 정말 운 좋은 사람이다. 아무리 학교를 나왔어도 고작 줄이나 갈아달라고 맡길 정도다. 하물며 세계적 명기는 10년이 지나도 운이 좋아야 만날 수 있는데 벌써 다 보았으니 정말 천운”이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부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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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식 씨는 귀국 전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심포니오케스트라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한 연주가이기도 하다.

실전을 통해 최씨 자신도 실력이 부쩍 향상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 명기를 수리할 때 벌벌 떨게 하던 두려움도 사라졌다. 1989년 봄 두 번째 행운이 찾아왔다. 현존하는 미국 10대 바이올린 제작가 중 한 사람인 독일계 킨베르크(F.Kinberg)와 만남이었다.

은퇴해 플로리다에 살던 그가 시카고에 있는 동생을 보러 왔다 이웃에 한국인이 서양악기숍을 한다는 말을 듣고는 신기해하며 구경 삼아 들른 것이었다.

“제가 작업하는 것을 지켜보던 그가 이내 훈수를 하는데, 정말 어디에서도 배우지 못할 그런 것들이었어요. 베이스 바를 조화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크레모나 바니시와 브래치아 밀란 바니시의 특징은 각각 뭐고, 공명을 방해하는 수지는 어떻게 없애는지 등등 주옥같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것도 처음 보는 동양인에게 열흘 동안이나요. 제게는 평생 잊지 못할 은인이자 스승입니다.”

오늘의 최씨를 있게 한 또 한 명의 귀인은 세계적 악기 수집가이자 딜러인 발트로그(R.Baltrog). 처음에는 실력을 테스트해볼 생각이었는지 스트라디바리를 가져와 간단히 손을 봐줬더니 이어 로제리를 맡기는 것이 아닌가? 역시 성의를 다했다. 그러자 이름만 들어도 따르르한 명기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마티·스트라디바리·벨곤지·과르네리 델제수·제이비 과다니니·몬타그니아니·갈리아노·루제리 등. “세계적 명기는 다 소장한 것 같았습니다. 이런 명기들은 보기만 해도 큰 공부가 되는데, 해체해 구석구석 볼 수 있게 해주었으니…. 장담컨대 세계에서 저만큼 많은 명기를 다뤄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발트로그 선생의 소장품만 40여 대를 손보았으니까요.”

최씨는 발트로그 덕분에 악기를 보는 눈이 말도 못하게 업그레이드됐다고 회고한다. 같은 스트라디바리의 작품이라고 해도 조금씩 차이가 있고, 또 그에 따라 소리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때 명기의 부분요소들을 일일이 기록해 훗날 이를 바탕으로 세계 최초로 <바이올린 선택법>을 쓸 수 있었다.

최씨에게는 이 밖에도 많은 신세를 진 은인이 있다. 시카고에 근거를 두고 활동하는 세계적 딜러 바이 앤드 후쉬, 케네스 워런과는 찾아갈 때마다 명기 6~7대를 보여줄 정도로 돈독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데, 특히 바이 앤드 후쉬의 세일즈 매니저인 가브리엘 벤다산(바이올리니스트)은 지난 20여 년 동안 명기 300여 대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또 최씨의 책에 추천사를 써준 프리츠 로터는 3대째 바이올린을 제작하는 마에스트로로, 틈틈이 그에게 악기 보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이와 함께 최씨가 평생 잊지 못할 사람으로 동포인 고 이진우 선생이 있다.

“이 선생님은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명기 복원가이셨죠. 시카고에 계셔서 1990년대 초부터 자주 찾아 뵈었는데, 워낙 유명하신데다 너무 기가 막히게 복원하시는 것을 보고 돌아가시던 해 한 달간 집중적으로 사사했습니다. 저를 각별히 생각하시고 매우 미세한 부분까지 가르쳐주셨습니다. 더 배웠어야 했는데 1996년 제가 악기 일로 파리에 갔다 온 사이 애석하게도 돌아가셨어요. 선생님이 돌아가시자 스트라디바리협회장인 가브리엘 벤다산은 ‘스트라디바리의 가격이 뚝 떨어지게 됐다’고 했을 정도예요. 1억 원짜리를 선생님이 손보시면 10억 원짜리가 되는데…, 한마디로 더 이상 스트라디바리를 복원할 수 없게 됐다는 말이었죠. 또 시카고심포니의 바이올린 수석주자가 자신이 소유한 20억 원짜리 스트라디바리를 선생님 명의로 심포니에 헌정했을 정도로 존경받았던 분입니다.”

다뤄본 악기 가격 합치면 수천 억 원 넘어

최씨는 이 선생이 쓰던 30가지 연장과 100년 이상 된 나무 30점, 그리고 특수도료 50점 등 유물을 물려받았다. 특히 연장은 선생님이 직접 만드신 것들로 그 자체가 문화재감이다. 최씨는 현재 명기 복원 및 감정에 관한 한 세계 누구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다고 자부한다.

물론 이 같은 자신감은 수많은 명기를 직접 다뤄본 경험에서 비롯된다. “술맛은 술을 많이 마셔본 놈이 제일 아닙니까? 악기도 그래요. 제아무리 이론에 밝으면 뭐해요. 직접 다뤄보지 않고서는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기’입니다. 제가 다뤄본 명기를 값으로만 치면 수천 억 원어치가 넘습니다. 처음에는 만지는 것조차 떨릴 정도로 비싼 것들이죠. 그만큼 귀한 것들입니다.”

최씨는 뭐니 뭐니 해도 폴란드에서 국보로 치는 그로블리츠(Groblicz)를 복원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한다. 그로블리츠는 폴란드 궁정악기 제작가였던 그로블리츠 1세(1540~1609)가 1606년 만든 현존 최고(最古)의 바이올린으로, 세계에 단 하나뿐이어서 값을 매길 수조차 없을 정도의 귀물.

하지만 2004년 최씨가 복원을 의뢰받았을 당시에는 소리가 나지 않는 거의 고물 수준이었다.“부분적으로 위판이 분리돼 있었고, 브릿지 셋업이 제대로 안 된 데다 엔드핀과 테일피스의 각도도 맞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또 사운드포스트의 두께도 투박한데다 위치도 좋지 않아 소리가 나지 않았어요. 전체적으로 손을 보아 소리를 찾는 데 열흘 걸렸습니다. 폴란드 국립악기박물관에서 즉석 연주회를 통해 확인되자 관계자들이 ‘신비의 소리를 되찾았다’며 환호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최씨는 어떤 바이올린도 척 보면 어느 시대 누구의 솜씨인지 단박에 안다. 물론 전체 형태·아웃라인·퍼플링·에프홀의 모양·스크롤·사이드(립스)·미들바이트의 네 코너·접합상태·몸통 안 상태·라벨·바니시(도료)·시바우트 곡선·소리 등 포인트별로 점검한다. 하지만 이것은 구체적 증거를 찾기 위한 작업일 뿐 노하우는 역시 숱하게 겪어본 경험에서 우러나는 감이다.

“바이올린의 상징인 에프(f)홀만 보아도 아마티·스트라디바리·과르네리가 확연히 구분됩니다. 에프홀은 위 구멍과 아래 구명에 따라 이어지는 나무 부위를 날개와 같다고 해서 윙스라고 하는데, 윙스의 양끝 두 면을 따라 선을 그으면 아마티는 선 끝이 합쳐지고, 스트라디바리는 평행선이 되는 반면 과르넬리는 치마처럼 벌어집니다. 갈리아노는 아마티형을 따르는데, 에프홀이 과르넬리형이라면 가짜라고 판정을 내려도 90%는 맞습니다.”

그는 소리로도 구분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물론 소리의 명확한 기준은 없어요. 스트라디바리가 녹음해 놓은 것도 없으니 있을 리 없죠. 하지만 소리 외에 여러 모로 검증된 진품이 있잖아요? 명기에서 나는 소리는 뭔가 달라요. 아마티는 소리에 기품 있고 매혹적이지만 전달력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치고 아마티로 연주하는 이는 없어요. 반면 스트라디바리는 대규모 연주홀에서도 유감없이 전달될 정도의 소리를 내주면서도 E선에서 절묘하게 뻗어나가는 것이 일품이죠. 이에 비해 과르넬리는 저음 G선에서는 큰소리가 나오는데 가슴을 파고드는 매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바이올린은 고음악기이므로 역시 스트라디바리가 선호받는 것입니다. 일반인에게는 어려운 말이지만 소믈리에가 와인의 맛을 구별해내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보면 됩니다.”

최씨는 지금까지 바이올린 22대, 비올라 3대, 첼로 5대 등 고작 30대만 만들었다. 1995년 인디애나주 노스부룩시에 제작소까지 만들어 놓고도 이 정도면 과작(寡作)임이 틀림없다. 1999년에는 국내 최초로 <바이올린 제작법>을 출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유가 있다. 명기를 다루면서 졸작을 내놓기 두려워서였다.

그래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결론은 나무였다. 처음에는 명기를 수리하면서도 기술적인 것에만 집착했지, 소리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얼마 안 돼 영근 나무에서 영근 소리가 나오고, 생나무에서 생소리가 나온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명기에 쓰인 나무를 보면 기가 막힙니다. 오랜 세월 지나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원래 악기를 만들 당시부터 완전히 숙성된 최고급만 쓴 겁니다. 나무가 숙성됐다는 것은 그 나무가 가진 성질이 더 이상 변하지 않도록 안정화됐다는 말입니다. 울림이 생명인 악기는 재질인 나무의 조직변화에 따라 엄청 다른 모습을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명기를 수리하려고 해도 그에 걸맞게 숙성된 나무를 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100년, 200년 된 것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나무를 숙성시킬 수 있을까 연구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나무를 오줌에 삭혀 보기도 하고, 술지게미에 재보기도 하는 등 목재 및 화학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구해가며 별의 별 방법을 다 써보았다. 같은 물질이라도 희석 배율에 따라 결과가 천지차이라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됐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나 하나 결실이 생겼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오존처리 등 6단계 처리를 거치면 명기에 쓰인 올드우드 못지않게 숙성시킬 수 있는 비법을 완성했다. 20년 만이었다. 2004년 집안 일로 일시 귀국한 최씨는 2007년 상명대 평생교육원에 바이올린 제작 최고위 과정을 설립하고 주임교수로 있으면서 제자를 통해 이 비법으로 숙성시킨 나무로 바이올린을 제작하게 해 보았다.

매우 훌륭한 소리가 나오는 것을 확인했다. 대성공이었다. 그는 이미 악기에 칠하는 특수도료에 대한 연구도 완성시켜 놓은 상태. 최씨는 지난해 서울에 연구실을 차렸다. 본격적인 제작과 함께 후학양성에 나서기 위해서다. 이미 제자도 와 있다.

“저는 단지 돈을 벌 목적으로 이러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이미 두 권의 책을 내면서 그랬듯,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후배들에게 물려줘 스트라디바리우스 같은 세계적 명장이 나올 수 있는 기반을 만들기 위한 겁니다.”

최씨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장담한다. 한국인 특유의 음악적 감성, 비상한 손재주에 자신의 노하우를 쏟아 부으면 못할 게 무엇이냐는 것이다. 최씨는 이를 입증하기 위해 우선 내년에 열리는 아메리칸바이올린소사이어티 주최 인터내셔널 바이올린 제작 경연대회에 제자 두 명의 작품을 출품시킬 계획이다.

이 대회는 바이올린 제작의 올림픽으로 통할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대회다. 최씨는 이와 별도로 현악기박물관 건립도 추진할 계획이다. 그는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어 값을 매길 수 없는 1622년 산 비올라 ‘발렌티노 씨아니’와 1762년 스웨덴의 요한베르그가 만든 첼로 등 자신이 소장한 명품은 물론 다양한 명품을 갖추어 후학들의 연구 장소로 활용하게 할 작정이다. 과연 명장은 마음 씀씀이도 명장인가 보다.

글 이만훈 월간중앙 편집위원 [mhlee@joongang.co.kr]
사진 최재영 월간중앙 사진부장 [presscom@hanmail.net]

① "한국이 봉…1000만원짜리 10억에 팔리더라"

② "명기위해 나무를 오줌에 삭히고, 술에 재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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