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진우의 행복한 책읽기] '후흑열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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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유비가 장유를 죽이자, 제갈량은 그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물었다. 이에 유비는 대답하였다.

"향기로운 난초라도 문앞에 피어나면 제거하지 않을 수 없지. 그 난초가 무슨 죄가 있느냐고? 그 죄는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있는 것이지. "

이종오의 '후흑열전' 에 나오는 고사의 한 대목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이처럼 돌연 목덜미를 서늘하게 만드는 구절이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철저히 현실주의에 입각해 사물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은 사람들이 흔히 감추고 싶어하는 인간사의 이면을 과감하게 들추어낸다.

금세기초 중국 사천지방에서 활약한 이 지식인은 서구 열강의 침입 아래 허망하게 와해되어가는 조국의 모습을 보며 인의예지에 입각한 성현들의 말씀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뼈저리게 체험했으리라. 그래서 그런지 그가 시종 강조하는 것은 제목 그대로 '두꺼운(厚)얼굴' 과 '시커먼(黑)뱃속' 이다.

개인이고 민족이고 간에 현실세계에서 궁극적으로 승리를 거두고 이름을 남기는 자는 뻔뻔스러운 뱃장과 음흉한 계산으로 무장한 자라는 것이다. '바르게 살아라' 라는 도덕군자의 박제화된 설교로는 '후흑' 을 당해낼 수 없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예컨대 유비는 이리저리 쫓겨다니고 남의 처마 밑에서 얹혀 살면서도 수치심을 갖지 않았음은 물론 울기도 잘했다.

그는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봉착하면 사람들을 붙잡고 한바탕 대성통곡을 하여 즉시 패배를 성공으로 뒤바꿔 놓았다는 것이다.

또 유방은 초나라 병사에게 쫓기고 있을 때 수레의 무게를 가볍게 하기 위해 친자식을 세 번이나 떠밀어내고 자기 생명만을 보호하려 했던 냉혈한이었다.

반면 항우는 '소인배의 혈기와 화' 를 참지 못해 천하를 얻는데 실패함은 물론 후세의 웃음거리가 됐다는 것이다.

이처럼 종횡무진 중국 역사를 훑어가며 거침없는 독설과 풍자로 후훅의 오묘한 이치를 설파하는 저자의 도도한 언변은 감탄스러운 데가 있다.

그의 주장이 대부분 궤변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글의 효용성 역시 흔해빠진 '난세의 처세술' 을 뛰어넘지 못했다는 근원적 한계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장은 나름의 매력을 뿜어내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세기말의 우리 현실이 아직도 이 책의 저자가 갈파하고 있는 바대로 '후흑의 논리' 에 의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후흑의 폐해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모두가 후흑에 능통하는 수밖에 없다면서 그 방법을 기술하고 있는데 이 부분 또한 대단히 재미있다.

'관직을 구하는 여섯가지 요령' 이나 '공무원의 여섯가지 지침사항' '일처리의 두가지 비결' 같은 대목이 보여주는 예리한 현실 파악은 통렬한 웃음을 머금게 만든다.

또 '후흑경' 이라하여 논어나 중용 같은 경전을 패러디한 부분이나 '공처가 철학' 에서 구사한 반어법도 성현 말씀이라면 무조건 머리를 끄덕이는 동아시아 백성들의 고정관념을 유쾌학게 배반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후련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일 뿐, 신문 방송을 어지럽히는 난마같은 현실을 보고 있노라면 한숨이 나올 뿐이다.

아마도 이런 현상을 유유자적 즐기고 있기엔 우리의 낯은 충분히 두껍지 않고 우리 속마음은 시커멓지 못한 모양이다.

남진우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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