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엄 인터뷰] 알랭 투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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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세계적 석학.지도자로부터 새 천년의 전망을 듣기 위해 마련한 '밀레니엄 인터뷰'시리즈 열두번째로 프랑스의 세계적 사회학자 알랭 투렌(사회과학고등연구원)교수와의 인터뷰를 마련했다. 현대사회의 위기를 이성의 도구화에서 찾으면서 이성과 '창조적인 주체'의 대화에서 그 명쾌한 해결을 제시한 '현대성의 비판'(문예출판사刊)으로 국내 지성계에도 널리 알려져 있는 그를 함재봉교수(연세대)가 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연구실에서 만났다.

- 21세기에 '문화' 의 중요성이 커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근대화.산업화를 주도해온 국가들의 영향력이 급속도로 떨어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기술지배를 가능케 했던 도구적 이성과 문화간 간극이 점차 커지고 있다. 전세계 어디를 가나 자동차.컴퓨터.시장경제는 보편화돼 가고 있는 동시에 문화적 차별성은 더욱 더 부각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가 보다 중요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

- 구체적인 예를 들면.

"미국에선 극우파가 '진정한 미국적 가치' 의 부흥을 주장한다. 프랑스의 신 드골파나 공화주의자들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한다. 이렇듯 도구적 이성과 문화간의 차이를 좁히지 못하면 권위주의가 득세할 것이다. 중동의 이슬람 정권이 좋은 예다. "

- 한국이나 동아시아에도 적용될 수 있는가.

"동아시아는 '연성 권위주의(soft authoritarianism)' 하에서 공동체를 강조해 왔고, 그 결과 근대화의 명제를 받아들여 경제적으로 성공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문화로부터 소외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이 한국과 동아시아에서도 문화에 대한 의식을 싹트게 한 것 같다. "

- 아시아적 가치 논쟁이나 문명 충돌론에서 드러나듯이 문화의 중요성과 함께 보편윤리의 정립도 중요한 주제로 떠오르고 있다.

"과거에는 보편윤리들이 특정 국가의 이념.정책과 밀접하게 연관돼 전파됐다. 미국 헌법에서 강조한 '자유' , 프랑스 혁명이 대변한 '자유.평등.박애' , 영국의 '의회민주주의' 가 그랬다. 과거에는 이처럼 특정 국가의 이념.가치.제도들도 보편성을 확보하는 데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됐다. 점차 도구화돼 가는 세계 속에서 사람들은 첨단 기술의 세계와 함께 각 국가의 고유한 문화적인 세계를 동시에 맛보고 싶어한다. 이 때의 문화란 꼭 전통문화만이 아니다. 전통문화를 재해석한 것일 수도 있고 새로운 민족적(new ethnicity)정체성이나 성적(sexual)정체성 같이 전혀 새로운 것일 수도 있다. "

- 그렇다면 문화적 정체성과 인권은 결국 조화될 수 없는가.

"이제 법과 인권이 보편적인 반면 문화는 특수한 것으로 대비해서는 안된다. 세계 도처에서 근대의 합리적인 가치체계와 문화적 다양성을 조화시키려는 욕구가 분출되고 있다. 오늘날 보편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근대화된 산업사회의 합리성과 각 개인이나 공동체의 가치관을 조화시킬 수 있는 권리다. 2백년 전까지만 해도 인권이란 곧 시민권 또는 투표권 등 정치적 권리를 뜻했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정치적.사회적 권리 외에도 문화적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

- '문화적 권리' 의 문제점은.

"일종의 문화적 볼셰비키들을 양산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자신들만이 진리의 담지자라고 주장한다. 이런 경향은 결국 이란의 경우 문화적 독재(cultural dictatorship)로 귀결되고 말았다. 반대로 여전히 문화적인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도 강하다. 자유주의는 정치뿐 아니라 문화에서도 미국식 삶의 양식을 강요하고 있다. 프랑스조차 아직도 모든 권리를 정치적인 차원에서만 규정하고 있다. 이는 매우 시대에 뒤떨어진 발상이다. "

- 이는 신자유주의 확산으로 공동체주의가 퇴조하는 대신 자유주의가 득세한 데 기인한 것은 아닌가.

"TV와 같은 매체의 확대와 교통수단의 발달로 사람들의 기동력이 전에 없이 증가하고 있다. 그 결과 사회규범이 약화되고 문화적 규범들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자유주의적인 것도, 또 공동체주의적인 것도 아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공동체주의자 마이클 월저와는 직접 토론을 벌인 일이 있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 볼 때 그는 전형적인 미국식 자유주의자일 뿐 결코 공동체주의자가 아니었다. 따라서 자유주의대 공동체주의의 논쟁은 무의미하다. 대신 주목해야 할 것은 문화간 교류의 중요성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합리성과 보편성을 기반으로 하는 세계관은 그 적실성을 급격히 상실해가는 반면 문화적인 동시에 경제적 삶이 그것을 대체해 나가고 있다. "

- 그 주장 역시 '개인' 을 가장 중시하는 것 아닌가.

" '개인' 보다 '주체' 라는 말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이는 '개인' 과 같이 사회를 초월 하는 개념이 아니라 사회에 기반을 두고 있는 사회 내적 차원의 개념이다. 이제 현대인은 각자 자신의 인생 얘기를 만들어 내는 작업을 통해 각자에게 의미있는 세계관을 구축할 권리가 있다. 신.합리성.자연은 더 이상 모든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세계를 제공해 줄 수 없다. 이제 모든 사람은 문화 속에서 자신의 세계관을 찾아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서양인들이 서양의 제도화된 교회보다 동양의 종교에 관심을 갖고 심취하기 시작하는 것은 비록 유치한 차원이라도 의미있는 현상이다. "

- 탈 냉전.탈 산업화 사회에서 현대인들이 추구해야 할 가치는.

"우리는 항상 도구적인 이성과 가치관 중심의 세계를 구분하려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둘 다 잃을 수밖에 없다. 정치와 사회를 엄격히 구분해 정치를 우선시하는 모델은 이미 1백년 전부터 작동하지 않게 됐다. 이제 모든 사람은 돈.기술.지식을 공유는 것과 동시에 문화적.역사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향유하고 싶어한다. 이러한 권리와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패러다임을 만들어야 한다. "

정리〓김창호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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