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558.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7면

제12장 새로운 행상 (36)

방극섭은 뜨아한 시선으로 한철규를 한동안 바라만 보다가 턱짓으로 좌판 뒤쪽의 블록 담을 가리켰다. 두 사람은 담 아래 쭈그리고 앉으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담뱃갑을 꺼내 들었다. 한낮의 햇살은 아직도 이마가 따끔거릴 정도였다.

"나가 알기로는 한선생이 정읍으로 오자고 한 까닭이 뭐신가 정읍사라는 노래하며 주인 대신 죽어준 개 야그에 홀려서 잠시 들러 본다지 않았어라?"

"그렇긴 하지만, 나는 한길 가에 나와 앉은 천하의 장돌뱅이 아니겠소. 갈 길이 바쁘고 찾아 볼 사람 있다지만, 한 몫 챙길 만한 거래가 눈에 빤히 바라보인다면 만사 제쳐두고 한 번 겨뤄 보는 것이 장돌뱅이 운명 아닙니까. 내가 챙길 잇속을 다른 놈들이 챙기면 우선 배부터 아프고, 자다가도 안달이 나서 벌떡 일어날까 무심히 지나칠 수 없어요. "

"배 아프면 약 사먹으면 되었지, 정읍에 주질러 앉을 것까지는 없어라. 거그다가 정읍 고추장이 시절마다 들썩한다는 야그는 나도 들어서 낯설지는 않소. 그렇다면 여그서도 이십년 삼십년 대물림으로 고추.마늘만 취급해온 도매상들이 많을텐디. 그 아사리판을 어뜨케 뚫고 들어가려고 그러는지 모르것네이□"

"지난해 경상도 영양에서 고추 차떼기로 한 몫 챙긴 경험이 있어요. 나도 고추라는 상품에는 안목이 있다는 얘깁니다. 성수기라면 단골 도매상들과 충돌 없이 거래를 성사시킬 수도 있어요. 고흥의 마늘 거래 때도 텃세 때문에 고충을 겪었던 일은 없지 않았습니까. "

"그땐 토박이로 가근방에 안면이 도타웠고, 승희씨도 사근사근해서 인심을 얻었지 않았으까이. 여그만 해도 나한테는 객지라는 걸 빤히 알고 있으면서 그러시오. "

목이 메도록 쏘아붙이는 꼴이 설득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한철규는 한 술 더 떠서 그를 옥죄고 들었다.

"방형과 입씨름이나 벌이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할 거요 말 거요? 딱 잘라 말해보시오. "

방극섭은 담배 연기를 훅 내뿜으며 말이 없다가 체념한 듯 이죽거렸다.

"내가 아무래도 물귀신한테 홀린 게벼. 오늘 새복에 집 나설 때부터 이상허게도 진작 돌아갈 것 같지가 않었어라. 나가 하루 운세는 족집게로 집어내 듯 알과녁을 맞히는 놈인디, 오늘 이런 소리 들을 줄은 모랐네요이?"

"집안 식구들 걱정되면, 돌아가도 좋겠지만, 난 쉽게 단념할 수 없어요. 안면이 대수겠소. 우리가 싣고 온 마늘을 도매상이나 상회에 적당한 값으로 넘겨주는 과정에서 안면을 터 봅시다.

도매상들은 고추와 마늘같은 양념류를 함께 취급하지 않소. "

"장구나 하나 사서 빵빵 치고 다니면, 승희씨가 알고 제 발로 찾아올 것인디…. "

고추 산지나 도매시세는 오전 내내 고추장을 맴돌면서 알아둔 터였다. 운임비도 못 건질 정도로 마늘을 헐값으로 넘기고 나니 방극섭은 공연히 허전한 모양이었다. 흥정을 하는 동안에도 사뭇 뒷전에서 팔짱을 끼고 서서 수수방관이었다. 자신의 고향 특산품이 헐값으로 거래되는 것이 찜찜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한철규의 내심은 잇속만을 노리자는 것에 있지는 않았다. 그가 잠시 정읍에 머물기로 한 것은 방극섭과 헤어질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에 있었다. 그 동안의 동업으로 손실을 당한 적은 없었지만, 고추 거래에서 생기는 이득만은 몽땅 그의 몫으로 건네줄 생각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동안 한씨 일행을 위해 그가 치른 애꿎은 마음의 빛을 못다 갚을 것이었다. 처음에는 내키지 않아 했으면서도 자취할 숙소를 찾아내는 일은 그가 도맡았다. 바로 시장 근처에 세 사람의 도차지로 기거하기엔 꽤나 널찍한 방을 얻어 들었다.

집으로 전화를 걸겠다고 나간 방극섭이 기다리기 진력날 때쯤에야 돌아왔다. 정읍에서 지체되는 일로 아내로부터 지청구깨나 들었는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으나 한철규는 모른 척 해버렸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