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이종찬 딜레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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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국가정보원이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 국민회의 부총재인 이종찬 전 국정원장의 문건 유출 사건을 놓고 뾰족한 대응방식을 찾지 못해서다.

3일 여권 일각에서 "李부총재가 갖고 나온 국정원 문건 중 내년 총선 등과 관련한 방대한 정치성 자료가 들어 있다" 는 주장이 흘러나오자 "사실무근" 이라고 해명하면서도 미칠 파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국정원 내부에선 "국가 최고 정보기관의 전.현직 수장간에 벌어지는 일들인데 우린들 대책이 있겠느냐" 며 속만 태우고 있는 표정이다.

국정원 감찰실은 이날 오전 李부총재의 보좌관인 최상주씨를 불러 보안조사를 벌였다. 李부총재의 문건 유출 경위, 문건 및 자료내용, 李부총재의 입장 등을 조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보관실은 오후 2시 종합적인 공식입장을 밝힐 예정이었으나 4시 이후로 발표를 미루는 등 입장정리에 진통을 겪었다.

진통의 이유는 李부총재에 대한 처리문제 때문인 것으로 전해졌다. 국정원 문건의 외부유출 가능성에 대해 李부총재를 상대로 한 직접 조사가 불가피하다는 쪽으로 기울다 입장을 바꿨다. 직접 조사가 간단치 않은 탓이다.

국정원 고위 간부는 "李부총재를 국정원이 아닌 제3의 장소에서 조사하는 등 예우를 갖출 수는 있겠지만 그에 대한 보안조사는 상식에 속하는 일" 이라고 강조했다.

여권 핵심 관계자는 "천용택(千容宅)원장의 李부총재에 대한 조사 의지는 대단히 원칙적인 것으로 알고 있다" 고 전했다.

李부총재가 원장 재직 때 개인적.정치적 목적을 위해 조직의 일부를 사적으로 가동한 혐의가 짙다는 게 여권 내부의 시각이라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李부총재가 국정원장 시절 정보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동교동계 사람들의 비판이 적지 않았다" 고 소개하면서 "千원장도 이번 기회에 국가정보기관 조직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입장이 확고한 것으로 안다" 고 전했다.

그럼에도 李부총재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결심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게 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그를 조사할 경우 李부총재의 저항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고려도 작용한 듯하다. 게다가 이 문제가 대여(對與)공세의 소재를 야당에 제공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조사를 지연시키는 이유라고 한다.

전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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