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국정조사 시간끌지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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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여야가 언론문건 의혹과 관련해 국정조사를 실시하기로 합의한 게 벌써 나흘 전이다. '성공적 개혁추진을 위한 외부환경 정비방안' 이라는 제목의 충격적인 문건이 지난달 25일 국회에서 폭로된 이후 열흘 가까이 온나라가 떠들썩한 판국에 정치권이 국정조사에 합의하고도 이토록 미적거리는 것은 말이 안된다.

우리가 보기에 여야가 조사위원회 명칭이나 증인채택범위.조사기간 같은 것을 두고 벌이는 줄다리기에는 진상규명 의지보다는 당략(黨略)이 더 많이 깔려 있다. 자기 당의 유.불리를 따지지 말고 이미 제기된 의문점 모두를 철저히 파헤쳐 국민 앞에 공개한다는 자세로 한시바삐 조사에 착수할 것을 촉구한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정부기관들을 동원해 주요 신문사들을 통제.장악해야 한다' 는 요지의 반(反)민주적이고 공작(工作)적인 문건내용을 보더라도 그렇고, 국회가 처리해야 할 산적한 다른 국정현안을 감안하더라도 이번 국정조사는 샅바싸움으로 시간을 끌 사안이 아니다.

언론문건 의혹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그런 제안이나 발상이 실제로 실행됐느냐 여부에 있다고 우리는 판단한다. 단순히 본분을 망각한 기자 한명이 괴문서를 작성하고 다른 기자가 이를 빼내 전달한 탓에 빚어진 소동이라면 문제가 이렇게 번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부에 의한 언론장악 기도 여부가 사태의 본질인 만큼 국정조사도 여기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문건작성이 단독행동인지, 여권 주변에 다른 비슷한 문건들은 없었는지, 이종찬(李鍾贊)국민회의 부총재 등 관련인물들의 말이 자주 바뀌는데 과연 어느 것이 진실인지 등도 규명해야 할 것이다.

국민회의가 왜 중앙일보 간부가 문건의 전달자라는 거짓말을 그토록 줄기차게 주장했는지도 밝혀야 한다.

정형근(鄭亨根)한나라당 의원에게 문건을 전달했다는 이도준(李到俊)평화방송 기자가 鄭의원으로부터 1천만원을 받은 데 이어 다른 건으로 2천만원을 받았다는 의혹이 나온 만큼 이것 역시 검찰수사와 별개로 소상히 알아봐야 마땅하다.

문일현(文日鉉)기자와 李부총재, 李기자, 鄭의원간의 인간관계와 접촉사실 등에 관한 사항도 사실규명을 위해 밝혀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리는 이같은 사실관계의 의문점들을 하나하나 풀다 보면 가장 중요한 초점인 문건이 실제로 언론정책으로 실행됐는지 여부도 드러날 것으로 믿는다.

여권을 중심으로 이번 사태를 '정보매수' 나 '무책임한 폭로에 따른 해프닝' 으로 보려는 시각도 있지만 그것 역시 국정조사에서 따지면 될 일이다.

시간은 많지 않다. 더 이상 여야가 진상규명 노력을 뒷전으로 미루고 신경전만 벌일 때가 아니다. 조사위 명칭이 문제라면 서로 만족할 중립적인 용어를 찾으면 되고 증인채택 범위도 접점(接點)이 있을 것 아닌가. 상대당 아닌 국민 앞에 나선다는 자세로 속히 조사에 착수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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