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한 규제완화 대형화재 부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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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정부는 90년대 들어서만 소방법 시행령을 모두 아홉차례 개정했다. 하지만 땜질식 행정이나 정치논리에 밀려 꼭 필요한 규정이 폐지되거나 완화되고 허점은 그대로 남는 등 파행을 거듭해 왔다.

지난 78년 만들어진 소방법에는 '모든 내장재(커튼.바닥재 등)는 불연재로 사용해야 한다' '모든 공사시 소방시설을 점검하는 담당자가 지정돼야 하고 이를 지키지 않으면 중형에 처한다' 는 등 엄격한 조항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내장재 조항은 건축자재 업체들의 강한 반발에 부닥쳐 85년부터 규제 해소 차원에서 서서히 완화되기 시작, 92년에는 있으나마나 한 규정이 됐다.

소방시설 점검 담당자 지정도 소방관의 비리가 우려된다는 이유로 규제 완화 대상에 포함돼 현재는 사실상 사문화됐다.

올들어 소방 관련 법규 1백4건이 규제 개혁이라는 원칙 아래 한꺼번에 개정된 것은 큰 문제로 지적된다.

개정된 소방법규로 노래방.단란주점 등 일부 업소에 대해서는 규제기준이 강화됐지만 이번 참사가 빚어진 호프집.일반 주점.대중음식점 등에 대해선 소방관리가 더욱 허술해졌다.

일부 소방.구청 공무원들의 비리를 없애는 데만 집착, 무리하게 법규를 바꿨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소방법규의 '사각지대' 또한 여전히 남아 있다. 실내장식을 위해 창문을 합판으로 막아버리는 등 내부시설을 개조한 건물이 있더라도 소방법상 일반음식점의 경우 지하층에 위치한 66㎡ 이상 업소만 소방지도가 가능하다.

따라서 이번 참사를 빚은 라이브Ⅱ 호프집처럼 건물 지상층에 자리잡은 업소는 아예 소방 지도 자체가 불가능하다.

전문가들은 일반행정 분야와 달리 많은 인명을 다루는 소방행정 등 재난관리 업무는 선진국처럼 관련 규정을 더욱 엄격히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일본의 경우 건물이 만들어질 때부터 소방관서가 일반 행정부서와 함께 참여, 방화 시설물을 점검한다.

건축허가 도면이 관할 행정 자치단체에 제출되면 소방관서가 이를 함께 검토해 방화관리상 하자가 발견되면 시정 명령을 내릴 수 있다. 또 건축과정에도 인화성 물질이 내장재로 사용되는지, 비상구 설치 여부 등을 감시한다.

영국.뉴질랜드.호주 등 영연방 국가들의 소방 관리는 가혹할 만큼 엄격하다.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대형 화재를 생지옥에 비교하기 때문이다.

소방관들이 주택이나 공공시설에 불시로 화재 대비 훈련을 발령, 강제로 입주자를 대피시킬 수 있다.

이규연.김선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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