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리더십이 중국 경제개발 모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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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박정희와 그의 유산’ 국제학술대회 참가차 한국을 찾은 김형아(사진) 호주국립대 교수. 그는 대학 4학년 때인 74년 한국으로부터 ‘도망쳤다’. 2005년 나온 그의 저서 『박정희의 양날의 선택』 서문에선 “유신 한국이 너무 살기 어려워서 다시는 돌아보지 않겠다는 모진 마음으로 그렇게 혼자 떠났다”고 썼다. 유신체제하에서 데모를 하다가 도망친 것이라고 한다. 유학도, 망명도 아닌 그 시대의 ‘사상적 난민’으로 그는 외롭게 호주에 정착했다. 그리고 3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는 근대화 ‘혁명가’로서 박정희를 재조명하고 있다. 김 교수는 “좌절했던 지난날을 넘어 박정희 시대와 화해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인터뷰는 20일 오후 연세대 상남경영원에서 2시간여 진행됐다.

-국내에선 이념에 따라 박정희 평가가 극과 극이다. 해외 학계에선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는데.

“이번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마틴 하트-랜스버그 미국 루이스 클라크대 교수는 대단한 좌파 학자다. 그는 박정희 개발독재 모델의 한계를 많이 지적한다. 하지만 ‘한국의 산업혁명이 민주화와 지금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평가한다. 박정희를 ‘독재자’라고 하지만 다른 나라의 독재자와는 너무나 다르다.”

-한국 진보학계의 박정희 평가에 대해선 어떻게 보나.

“최근에는 박정희 시대 산업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진보학자도 생겨나는 등 많은 변화가 있다. 하지만 지금도 박정희의 리더십에 대해선 굉장히 부정적이다. 평가 자체를 안 한다. 독재에서 무슨 긍정적인 면을 찾을 수 있겠느냐며 학문의 문호를 열지 않는다.”

-박정희의 리더십, 지도력이 지금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의미가 있나.

김형아 호주국립대 교수는 “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야말로 박정희 시대의 정신적 유산”이라고 말했다. 사진은 생전의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 뜰에 핀 꽃을 보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지도자의 리더십에 대한 학술적·대중적 토론이 활발해야 한다. 강력한 지도자를 독재자로만 생각해선 안 된다. 지금 모든 세계가 ‘강한 지도자’를 찾고 있는데 한국만 그렇지 않다. 국가 지도자 리더십의 성격은 무엇이며, 지도자의 역량과 비전은 어때야 하는지 지성인들이 사상에 구애되지 말고 토론해야 한다.”

-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과 유신체제가 불가분의 관계라고 주장했는데.

“박정희 독재는 날아오는 화살을 막는 철판과도 같았다. 그 방패 뒤에서 한국의 테크노크라트들이 중화학공업을 키워 산업혁명을 이뤘다. 지금 중국의 경제개발 모델이 뭔가. 바로 박정희 모델이다. 중국의 특성은 테크노크라트들의 강력한 역할에 있다. 그게 바로 박정희 유신 시대의 특성이기도 하다. 유신이란 악마적 독재를 했지만, 그 체제와 그 시대의 산업혁명을 분리해 이해할 수 없다. 그건 동전의 양면이다.”

-이번 심포지엄에서 박정희 시대가 남긴 ‘할 수 있다(Can Do)’ 정신의 긍정적인 면을 강조했는데.

“80년대의 386들은 절대빈곤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부모 세대와 달랐다. 하지만 정신적인 면에서 계승한 게 있다. 산업화 세대의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 캔 두(Can Do) 정신이다. 80년대 학생운동 주도 세력은 산업화 시대의 ‘캔 두 정신’을 갖고 민주화란 꿈을 이룬 것이다.”

-박정희의 ‘할 수 있다’ 정신은 함석헌 등 자유주의 지식인들도 바랐던 거라고 했는데.

“한국인의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정신은 박정희 개인이 만든 것도, 민주화 지도자들이 심어준 것도 아니다. 잠자고 있던 우리의 민족성을 그 시대가 끄집어내 폭발시킨 것이다. 나는 4·19혁명 이후 5·16 직전까지의 잡지 ‘사상계’에 주목하고 있다. 지식인들의 토론이 가장 활성화된 시기다. 이때 장준하는 ‘근로만이 살길이다’라는 글을 발표하며 한국인의 게으름·허세를 질타했다. ‘땀 흘려 일하게 하라’는 장준하의 주장을 박정희가 흡수한 것이다. 당시 박정희와 혁명 주역들은 ‘사상계’를 열심히 읽었다.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의 영향력을 너무 잘 알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한국은 산업화도 민주화도 다 이뤘다. 이젠 정신적·문화적인 면에 집중해야 한다.”

-보수진영의 박정희 평가에 대해선 어떻게 보나.

“지금 한국은 보수의 나라다. 보수가 너무 독점하려 들면 안 된다. 경쟁이 없는 사회는 건강하지 않다. 박정희 없는 김대중은 없었을 것이며, 김대중 없이 박정희가 있을 수도 없다. 박정희에 맞선 민주화 세력들의 존재 때문에 이 나라에 경쟁이 불붙을 수 있었다.”

-해외에서 박정희 연구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호주로 도망 와선 한국과 완전히 고립돼 살았다. 정말로 잔인할 정도로 일을 하고 공부를 했다. 캔버라에서 초등교사를 10여 년 한 뒤 뒤늦게 대학원에 갔다. 처음엔 김일성의 주체사상이 관심사였으나 우연찮게 박정희 연구로 바뀌었다. 그렇게 박정희 시대와 시간적 거리를 두고 바라보니 나름의 객관적 시각이 생기는 것 같다. 또 한국이 아닌 호주에서 연구했기 때문에 이념을 따지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었다. 한국에서 나를 보수라고 하든 진보라고 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박정희 시대의 ‘사실’만이 중요하다.”

배노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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