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국가보안법 유지해야 할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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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회의 국가보안법 폐기 권고는 안보를 가볍게 여기는 최근 우리 사회 풍조가 절정에 달했음을 반영하고 있다. 미국은 여전히 한반도 상황이 매우 위험하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주한미군 감축의 적절성이 미국 대통령 선거 쟁점으로까지 떠올랐다. 태평양 넘어 미국이 우리의 안보 정세를 걱정하고 있는데, 정작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는 강 건너 불 보듯 하는 형국이다. 한 술 더 떠 우리는 그간 우리 사회를 지켜온 안보장치를 해체하는 데 매우 열심이다. 인권위의 이번 결정도 국보법이 지닌 안보적 순기능을 도외시한 채 내린 것이다. 과거 인권 침해 사례가 있었음을 들어 국보법이 악법이고, 그래서 폐기해야 한다고 권고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인권위는 국보법 인권 시비가 기본적으로 당시 정치적 상황과 법 집행 과정의 무리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간과했다. 일반 형사법도 인권을 무시한 채 운영되고 집행되면 얼마든지 인권 시비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국보법 오용 사례는 거의 대부분 10여년 전 군사정부 시절에 발생한 것이다. 그 이후 김영삼.김대중, 그리고 노무현 정부로 이어지면서 이 법과 관련한 인권 시비 사례는 전무한 실정이다. 이는 바로 국보법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이를 정치적으로 악용한 정권의 문제임을 극명하게 방증하고 있다.

또한 국보법의 의의는 간첩 색출이라는 법 기능적 차원에서만 따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국보법이 그간 형사법적 차원을 훨씬 상회하는 중대한 안보적 역할을 감당해 왔기 때문이다.

국보법은 사실상 우리의 대북 억지전략 '패키지'의 한 축을 형성해 왔었다. 우리 군의 방위력과 주한미군이 그간 북한의 대남 무력의지를 억지해 왔다면 국보법은 북한의 대남 간접침략을 억지해 온 것이다. 최근 북.일 간 외교 현안이 되고 있는 일본인 납북 사건의 본질도 실상은 북한의 대남공작에 있다. 북한이 대남 침투가 용이하도록 일본인 강사를 확보할 목적으로 납치 사건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북한은 수십년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올인'하는 식으로 대남공작을 추진해 왔던 게 우리의 현실이었다. 이에 맞서 우리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그간 수많은 대공요원이 밤을 낮 삼아 북한과 치열한 정보전을 치러냈었다. 이를 뒷받침한 법적 장치가 바로 국보법이었다. 그 과정에서 이미 잘 알려진 대로 무리도 많았다. 그래도 현재 우리 사회가 이만큼의 모습을 갖추는 데 국보법의 기여는 결코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국보법 폐기는 우리 사회가 보호의 빗장을 풀고 북한의 대남 공세를 우리 사회 안으로 스스로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또한 이미 중증 상태에 있는 우리의 안보 불감증을 결정적으로 악화시킬 것이다. 안보 기강은 해이해지고 안보를 소중히 생각하는 사회적 기풍은 더욱 약화할 것이다. 이를 북한 정보 당국이 놓칠 리 없다. 그렇게 바라던 국보법 폐기가 현실이 된 상황을 북한은 '남한혁명 역량 강화'의 호기로 철저히 이용할 것이다. 그 결과 우리 사회 내의 친북 분위기는 '민족공조'라는 이름으로 기승을 부릴 것이고, 반미 운동은 더욱 격화되는 양상을 보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 조성은 우리의 전반적인 안보의지와 대북 억지력의 약화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현상의 초래 가능성이 국보법 폐기의 위험성이다.

1960년대 중반 로버트 케네디는 "자유를 지킴에 있어 극단주의(extremism)는 덕(virtue)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국가를 보위함에 있어 과도할 정도의 철저한 대비는 오히려 바람직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북한의 위협이 명백한 우리 현실에 비춰 국가보안법은 결코 과도한 안보장치가 아니다. 최소한의 필수적 안전장치일 뿐이다. 이것마저 스스로 해체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말아야 한다.

이병호 울산대 초빙교수.전 국가안전기획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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