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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를 넘어] 6. 실존주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중앙일보가 밀레니엄 기획의 일환으로 경남대(총장 박재규)와 공동으로 기획취재한 '세기를 넘어' 여섯번째로는 실존주의를 마련했다.

20세기 인물.사상.사건의 현장을 찾아 21세기의 대안을 모색하는 이 기획에서 실존주의를 선택한 것은 20세기 초.중반의 역동적 세계사적 과정에서 실존주의가 '실천적 지식인' 의 전형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근대화의 모순이 폭발적으로 들어난 1, 2차 세계대전과 냉전을 거치면서 발생하고 성장한 실존주의는 주체의 선택에 의한 역사의 진보와 그에 따른 책임을 강조했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에서도 지식인 사회의 지적 흐름을 형성하기도 했던 실존주의가 비록 흘러간 철학사상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남긴 지적 유산을 지면을 통해 되새겨 보고자 한다.

"사르트르 선생. 당신이 남긴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한다. 당신이 남긴 것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고 생각하고 존재하고 느끼기 때문이다. … 보부아르 여사여. 모든 여성의 삶을 인간답게 만든 당신에게 감사한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당신들이 함께 보여준 '사랑과 자유의 일치' 를 감사한다. "

또하나의 주검이 묻히고 있던 파리시 외각 몽파르나스 묘지. 정문 우측으로 약 20여m를 가면 초라하리만치 평범한 비석이 세워진 이들의 무덤을 발견할 수 있다.

석단은 일본인들이 놓고 간 꽃다발과 추념을 표시하기 위해 작은 돌멩이를 얹어 놓은 지하철표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그 중에서도 '사랑과 자유의 일치' 를 헌사한 독일인의 쪽지가 눈길을 끌었다.

'사랑과 자유의 일치' -. 그것은 세계 2차대전이라는 인류 최대의 비극 속에서 성장한 참여적 지식인에겐 투쟁의 목표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르트르가 생전에 지식인들과 토론을 즐겼던 생 제르맹 거리의 카페에 들렀을 때 그곳에서 강렬한 초가을의 햇빛을 즐기던 사람들에겐 그것이 '현실' 이었다.

카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프랑스 지성의 심장' . 그곳에는 소르본 대학과 사르트르가 1924년 레몽 아롱.폴 니장.조르주 캉귀엠.장 이폴리트.메를로 퐁티 등 60년대 이후 프랑스 지성을 대표하는 인물들과 함께 입학한 파리고등사범학교(Ecole' Normale Supe' rieure)가 위치해 있었다.

사르트르가 시몬 드 보부아르와의 '계약결혼' 으로 세간의 화제를 뿌리면서 평생 동안 지적.정서적 동반자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자유를 위한 고뇌와 사랑의 열정이 어우러진, 당시 이곳에 모인 인문주의자들의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실존주의의 등장은 1, 2차 세계대전 전후 나타난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지식인의 대응이었다. 19세기 말 키에르케고르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해 20세기에 들어와 비로소 철학.문학.예술적 이론.경향으로 자리잡은 실존주의. 그것은 합리주의.객관주의.기계주의가 지배, 산업화.대중화되면서 개인의 진정한 모습이 퇴색해 가는 시대상황 속에서 개인의 자유를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심을 갖는다.

이에 대한 실존주의의 결론은 이렇다. "인간은 미완의 존재로서 상황 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은 상황 속에서 자신을 내던짐(企投.Ent-wurf)으로써 주체성을 획득한다. 주체성은 자신을 자유로이 창조한다는 의미에서 자유다. "

사르트르를 본격적인 참여적 지식인으로 변모케 한 것은 2차대전. 선전포고와 함께 소집돼 참전했다가 곧 포로가 된 그는 41년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해 퐁티와 보부아르 등 뜻이 맞는 친구들과 서클을 만들어 문필활동을 시작한다.

사르트르의 시대를 가로지르는 역작은 43년 발표한 '존재와 무' 였다. 비록 당시엔 널리 읽히지는 않았지만 상황에 대항하는 의지적인 투쟁을 통해 자신의 자유를 주장한 이 책을 통해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는 명제를 확정한다.

자유와 책임.휴머니즘을 강조한 사르트르는 2차대전을 통해 지식인들이 경험한 레지스탕스의 도덕적 가르침을 구체화한 것이었다.

'사르트르 평전' (로로로 출판사刊)의 저자 발터 비멜(전 국립예술아카데미)교수는 사르트르의 메시지를 이렇게 요약했다.

"누구도 우리에게서 우리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할 책임을 제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떠한 길이 우리 자신이 찾고 있는 길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자는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있다. 실존적 선택이 과학적 전망을 결여할 경우 역설적으로 상황에 매몰되는 니힐리즘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따라서 같은 실존주의 동료들 사이에서도 어떤 정치적 전망을 갖느냐에 따라 논쟁과 갈라섬은 불가피했다.

2차대전 후 사르트르가 선택한 전망은 인간적 마르크스주의였다. 사르트르가 1946년 '현대' 지에 쓴 '유물론과 혁명' 에서 그는 인간학적 문제들을 결여한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면서 변증법은 인간의 실천을 통해 끊임 없이 물화를 극복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유로 사르트르는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미 제국주의로부터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보호해야 한다고 믿었고, 그 때문에 한국전쟁.헝가리 부다페스트 침공을 소련의 침략행위라고 규정한 퐁티와 갈라서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주의에 대한 믿음을 버리기까지는 '프라하의 봄' 을 기다려야만 했다. 1960년 전후 제3세계의 민족해방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오랜 친구 알베르 카뮈와의 결별은 불가피했다.

사르트르는 알제리의 심리학자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을 자들' 의 서문을 써 프랑스에 소개하면서 알제리 전쟁에 반대했던 반면 카뮈는 알제리 독립에 찬성하지 않았다. 카뮈는 57년 노벨상을 받았을 때 알제리 학생들의 질문을 받고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만약 누군가가 자유라는 이름으로 버스 위에 폭탄을 터뜨린다면, 그리고 그 버스 안에 나의 어머니가 타고 있다면 나는 더 이상 자유를 지지할 수 없다. 그것은 정의롭지 못하다. "

미 주간지 뉴스위크는 지난 7월 19일 '세기의 목소리' 라는 연재기사에서 '알제리에서 자라나 배고픔을 경험했던 카뮈와 프랑스 유수의 부르주아 출신인 사르트르, 인간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믿는 사르트르와 우연적인 사건을 더욱 믿었고 사고로 죽은 카뮈' 로 두 사람의 차이를 설명했다.

모순이 폭발했던 20세기가 끝나는 시점에서 그가 오늘날의 지식인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보편적 지식인에 대한 요청일 것이다. 65년 일본에서 개최된 '지식인을 위한 변명' 이라는 강의에서 규정한 "자신의 이익과 상관 없이 인간과 사회의 전체적 이해를 위해 일반적으로 인정된 진리와 행위 전체를 문제삼는 지식인" 이야말로 이 시대가 또다시 요청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 편집국에서 만난 리베라시옹의 창간자 중 한 사람이자 철학 전문기자였던 필립 가비는 왜 지금 사르트르를 다시 기억해야 하는지를 이채롭게 설명했다.

"사르트르의 인격과 저작은 상호분리될 수 없이 한 세기를 특징지은 지식인상(像)을 세웠다. 현재와 같은 신 자유주의가 계속 지배해 한계에 이르게 될 때 새로운 삶을 모색하는 갈등이 증폭될 것이며, 그때 사르트르의 보편적 지식인은 하나의 전범(典範)이 될 것이다. "

1980년 4월 폐암으로 죽을 때까지 모든 권력과 권위를 배격한 '철저한 자유인' 사르트르-. 그 기억은 권력이나 권위의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오늘날 프랑스인들이 향유하는 자유, 그 자체가 사르트르의 기억일 뿐이다.

파리〓김재현(경남대.철학)교수,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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