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보도 왜관·덕승교 폭파사건] 왜관·고령 생존자 회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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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한국전 당시 왜관교가 폭파돼 피란민 수백명이 학살됐다' 는 AP통신의 보도와 관련, 왜관 현지 주민들은 미군의 다리 폭파사실을 기억해내면서도 학살 진상은 정확히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칠곡군 향토사학자 박호만(朴鎬萬.71.왜관읍 왜관1동)씨는 "미군이 다리 폭파에 앞서 8월 3일 오전부터 소개령을 내려 왜관 주민들은 대부분 읍사무소에서 피란증을 교부받아 대구.청도.밀양 등 남쪽으로 피란갔다" 고 말했다.

또 이상천(李相天.69.전 왜관읍장)씨는 "주민들 피해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으며 50여일 뒤 피란에서 돌아온 뒤에도 마을에서 누가 죽었다는 얘기는 들은 기억이 없다" 고 증언했다.

왜관 주민들은 대부분 소개령에 따라 남쪽으로 피란, 폭파 장면을 목격하지 못했고 희생자도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칠곡군 약목에서 남하해 낙동강을 건너려던 백환기(白煥基.60)왜관읍장은 "당일 오후 다리 앞에 이르렀을 때 피란민 가운데 인민군이 섞였다는 이유로 미군이 피란행렬에 마구 총을 쏘아대 우리 일행은 왜관교 도하를 포기하고 성주로 길을 바꿨다" 며 "당시 왜관교와 강을 건너던 많은 피란민들이 미군의 총에 맞았다" 고 증언했다.

결국 당시 대규모 희생자는 김천 등지에서 내려와 폭파 당시 낙동강을 건너려던 타지역 피란민들이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칠곡군지(漆谷郡誌)는 '폭파 당시 밤 하늘에 불꽃놀이를 하듯 파편이 날면서 인도교의 트러스와 상판이 무너져내렸다… 뒤에는 적이 밀려오고 막다른 골목에서 피란민들은 수심이 얕은 곳으로 몰려갔다.

다급한 부녀자들은 등에 업은 아기가 익사한 줄도 모르고 강을 건너느라 희생자가 속출했다' 며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적고 있다.

현지 주민의 희생이 적어서인지 왜관에선 지금까지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대책위원회 같은 조직도 구성되지 않았다.

미군이 경북 고령군 득성교(현재 옛 고령교)를 폭파하면서 많은 민간인이 학살됐다는 보도에 대해서도 현지 주민들은 미리 피란해 희생자 규모 등을 잘 모르고 있었다.

김흥기(金興基.79.고령군 성산면 득성리)씨는 "지서에서 주민들에게 '다리를 건너지 않으면 인민군으로 간주한다' 고 통보해 마을주민 대부분이 피신했다" 며 "그러나 다리가 끊어진 당일 달성군 논공면 피란민을 향해 미군 비행기가 폭격을 가해 희생자가 많이 발생했다" 고 회상했다.

당시 피란길에 나섰던 이정립(李廷立.75.성산면 삼대리)씨는 "다리를 건넌 후 사흘 뒤에 득성교가 폭파됐다" 며 "친형님이 다른 길로 피란가다 미군이 쏜 총에 즉사했다" 고 증언했다.

李씨는 당시 "외지에서 온 피란민 숫자가 엄청났으며 그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는 얘기는 확실히 들었다" 고 덧붙였다.

한편 칠곡군과 고령군은 AP통신 보도와 관련, 14일 군수 주재로 회의를 열고 진상조사와 대책위원회 구성방안 등을 논의했다.

칠곡군 최재영(崔在永)군수는 "칠곡 왜관교는 군 작전상 폭파가 불가피했다며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과는 개념이 다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며 "먼저 목격자나 희생자 유족 등을 파악하겠다" 고 말했다.

칠곡〓송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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