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세상] '땅속의 제왕' 두더지를 사랑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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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10년 전인 1999년 9월 어느 날. 20여 년간의 공직을 접고 명예 퇴직한 나는 다음날 농기구를 만드는 대장간에 갔다. 아버지가 쓰던 호미와 괭이를 사가지고 오는 길에 고무신 가게에도 들렀다. 검정고무신을 보자 아버지의 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 고무신을 한 켤레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신던 구두를 던져버리고 고무신으로 바꿔 신었고 볼펜 대신 손에는 호미와 쟁기를 쥐었다. 함께 지내던 동료는 보이지 않았고 주변엔 우거진 잡초와 눈부신 태양만이 나를 환영했다. 잡초를 뽑으려고 땅을 파보니 지렁이가 나왔고 어느새 나보다 먼저 땅을 파고 지나간 두더지가 있었다.

‘바로 이거야’ 두더지는 작지만 곰같이 튼튼하고 강했으며 큰 곰을 작게 뭉쳐놓은 것처럼 귀여웠다. 눈은 바늘구멍 같이 작았고 움푹 들어갔으며 보석처럼 빛났다. 앞발은 호미보다 날카로웠고 뒷다리는 타이어만큼 강하고 질겼다. 주둥이는 송곳처럼 날카롭고 강했다. 두더지가 입은 옷은 갑옷처럼 질겼고 털은 물에도 젖지 않고 흙도 묻지 않는 특수모였다.

다시 말하면 세파에 물들지 않았고 귀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세상 사람이 무슨 말을 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꼬리도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아부나 아양 따위도 필요치 않았다. 다른 동물처럼 고개를 뻣뻣이 들고 멋대로 돌아다니지도 않고 손바닥 발바닥으로 땅속을 기어 다니며 안전과 겸손을 드러냈다.

밟아도 꿈틀거리지 않으며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죽은 후에도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따로 묻어줄 필요도 없다. 두더지가 지나간 곳은 작은 쟁기가 지나간 것처럼 땅이 일궈지기도 했다. 세상 사람들은 빛을 보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데 두더지만은 밤과 낮이 필요 없는 어두운 길을 가고 있다. 혼자서 땅만 파고 살아가는 두더지가 부럽다. 그래서 두더지를 땅속의 제왕이라 부르는지도 모른다. 나는 두더지를 이해하고 사랑한다. 두더지의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음성도 들을 수 있다.

땅만 파면 먹을거리가 생기고 집도 동료도 필요 없고 부럽기만 하던 두더지에게도 어느 날 날벼락이 떨어졌다. 천지가 진동했고 굉음소리가 두더지를 괴롭혔다. 굴삭기가 두더지를 덮쳤고 조용한가 했더니 농부가 잡초에 제초제를 뿌려 풀 한 포기도 남기지 않고 모두 죽게 만들었다.

모든 풀이 다 죽었고 땅 속의 풀벌레와 지렁이도 죽어 두더지는 먹을 것을 다 잃게 됐다. 살아갈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두더지가 사라지면 땅을 파던 농부도 사라질 수 있다. 농부와 두더지는 친구이기 때문이다. 농부가 없으면 사람들도 먹을 게 없어 죽어갈 수 있다고 지금도 두더지는 땅속에서 울고 있다.

두더지는 말한다. ‘내가 살기 좋은 풀밭은 만드는 데 10년이 걸리고 그 풀밭을 파괴하는 데는 순식간’이라고. 자연과 함께 숨을 쉴 수 있다면 두더지는 누가 보던 지 듣던 지 상관 없이 춤을 추고 노래할 것이다. 두더지는 지금도 나무가 자랄 수 있도록 땅을 일구고 거기엔 빗물이 스며들고 낙엽과 거름이 만들어지고 지렁이가 번식해 옥토를 만들고 가을이 되면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도와줄 것이라고 땅속에서 속삭이고 있다.

산새가 울고 개구리가 우는 것은 산천이 좋아서가 아니라 산천이 병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사람 곁에서 떠났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는 산천초목까지 사랑해서 새들이 노래 부르고 벌과 나비가 춤추고 물고기가 살아 움직이는 산천을 만들자.

이광용(농업·환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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