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4. 시 - 문정희 '사람의 가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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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나의 신은 나입니다. 이 가을날
내가 가진 모든 언어로
내가 나의 신입니다
별과 별 사이
너와 나 사이 가을이 왔습니다
맨 처음 신이 가지고 온 검으로
자르고 잘라서
모든 것은 홀로 빛납니다
저 낱낱이 하나인 잎들
저 자유로이 홀로인 새들
저 잎과 저 새를
언어로 옮기는 일이
시를 쓰는 일이, 이 가을
산을 옮기는 일만큼 힘이 듭니다
저 하나로 완성입니다
새, 별, 꽃, 잎, 산, 옷, 밥, 집, 땅, 피, 몸, 물, 불, 꿈, 섬
그리고 너, 나
이미 한편의 시입니다
비로소 내가 나의 신입니다. 이 가을날

<전문, '시안' 2003년 겨울호 발표>

◇ 약력
-1947년 전남 보성 출생
-69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 '남자를 위하여'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76년 현대문학상, 96년 소월시문학상
-미당문학상 후보작 '사람의 가을' 외 18편

시인 문정희씨는 "계절에 어울리겠다"며 자신의 미당문학상 후보작 19편 중 '사람의 가을'을 독자들에게 내놓았다.

'사람의 가을'은 지긋한 중년, 깊은 가을 등을 연상시킨다. 마침 요즘은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환절기. 곧 완연한 가을로 접어들 것이다.

문씨는 "지난해 가을 미국 체류 중 '사람의 가을'을 썼다"고 밝혔다.

뉴욕주의 한 예술촌에 파묻혀 한국말.한국 음식 등 낯익은 것들을 모두 던져버리고 안으로 침잠하기를 한달여. 문씨는 "어느 날 해질 녘 창밖을 보니 빨갛게 단풍 든 나뭇잎들이 빛나면서 표표히 떨어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문득 "모든 존재는 소외된 개별자가 아니라 충만한 단독자로 빛난다는 것, 가을은 인간 존재가 충만한 단독자임을 일깨우는 신성한 계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어디에선가 읽은, 신이 검을 들고와 인간의 사지(四肢)를 차례로 잘라낸 후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도 잘라냈다는 이야기도 생각이 났다. 그 이야기의 의미는 인간은 결국 아프고 슬프고 고독할 수밖에 없지만 자체로 완성된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는 "단독자의 신비로운 자유로움이랄까, 모든 존재 하나하나가 자체로 완성품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됐다"고 말했다.

그 같은 사유는 결국 문씨의 머리 속에서 한국어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는 마침 "충만한 단독자라는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는 단어들은 한국어에서 모두 한 음절 단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사람의 가을'은 그런 깨달음들을 정신없이 써내려간 것이다. 문씨는 "써놓고 나니 깊은 우물을 길어올려 목욕한 듯한 느낌이었다. 정말 내가 썼나 싶을 정도로 흡족한 시였다"고 말했다.

문학평론가 김수이씨는 '사람의 가을'이 "시인의 언어가 노래하고자 하는 대상과 진정으로 일치하는 드문 순간, 그래서 시인이 신의 경지에 오르게 되는 순간을 제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시 첫머리를 '나의 신은 나입니다'라고 도발적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언어에 대한 예찬, 시에 대한 예찬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김씨는 "쉽고 평이한 언어로 쓰여졌지만 언어와 존재, 시인의 관계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을 담고 있다"며 "복잡하고 무거운 해석들은 안에 감춘 채 쉽고 친절하게 표현하는 것이 문정희 시의 전략이자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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