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개천절 유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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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우리 사상의 옛줄기로 따진다면 ‘개천(開天)’과 ‘홍익인간(弘益人間)’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러나 정작 개천절에 즈음해서도 왜 ‘개천’인지? 왜 ‘홍익인간’인가에 대한 오해가 적지 않은 것 같다.

가령 ‘홍익인간’만 하더라도 대개의 뜻풀이는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는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 고작이다.이같은 풀이는 일찍이 이병도(李丙燾)가 ‘삼국유사’를 번역하면서 쓴 것이라고 지적된 바 있다.

한데 이런 풀이는 언뜻 그럴 듯하게 보이긴 하지만 근본을 왜곡시킨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선 안될것 같다.‘홍(弘)’이라는 한자만 하더라도 이것을 ‘널리’로 풀이한 것은 잘못이다.‘홍’이란 한자의 훈(訓)은 ‘클 홍’으로 되어 있으므로 ‘널리’보다는 ‘크게’라고 번역하는 것이 바른 풀이이기 때문이다.일반적으로 ‘널리’의 뜻은 PR나 홍보를 말할 때 쓰이는 것도 사실이다.하지만 이른바 건국이념은 ‘크게’라고 풀이해야만 제격이다.‘크게’의 뜻을 제쳐 놓고 ‘널리’로 풀이한 것은 차원(次元)을 격하시킨 것이나 진배없는 일이다.

‘익(益)’이라는 글자만 하더라도 이것을 ‘이롭게’로 풀이한 것은 잘못이다.‘익’을 ‘이롭다’또는‘이익이 된다’는 뜻으로 해석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이기적(利己的)생각의 뿌리를 깊게해 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익’이라는 한자가 지닌 본래의 뜻은‘돕는다’로 풀이해야만 한다고 일컬어진다.‘이롭다’는 것과‘돕는다’는 것은 차원이 전혀 다른것이다.

이렇게 보면‘홍익인가’이란‘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크게 돕는 인간’이라야 맞는다.‘홍익인간’과 관련해서 우리의 옛 전거(典據)를 보면 그것이 성통공완(性通功完)을 이룬 인간을 뜻하는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이것은‘홍익인간’에서 말하는‘인간’이 보통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해준다.

그것은 덕망이 높은 대인(大人),삶의 진정한 가치를 남을 돕는데 바치는 그런 인간을 말한다.그런 인간이기에 성통공완한 사람이고 홍익인간인 것이다.

사실 나라를 세운 것을 기리는 날을‘개천절’이라고 이름 붙인 것도 범상스런 것이 아니다.건국(建國)이나 개국(開國)이란 말 대신에‘개천’,즉 ‘하늘을 열었다’는 뜻의 말을 쓴것은 우리 조상의 얼과 슬기가 어떤 것인지를 웅변해 주고도 남는다.

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그것은 하늘(天)의 뜻을 펼치는 것(開)이 시(始)와 종(終)을 이룬다. 그러기에‘개천’은‘개지(開地)’하고‘개인(開人)’하는 그런 건국인 것이다. 그런 뜻에서‘홍익인간’은 ‘개천’에서 ‘개인’에 이르는 당연한 귀결이다.

이런 차원에서 개천절은 우리 겨레 최고의 국경일임이 분명하다. 나는 개천절 다음은 한글날이라고 믿어 마지 않는다. 한데 정부의 기념행사를 보면 그런 우선순위에서 가치관의 전도현상이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다. 올해 개천절을 계기삼아 이런저런 잘못이 시정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가치관의 전도현상은 일부 종교적 광신자의 단군상 훼손과 뒤얽혀 개천절을 맞는 우리의 마음을 너무나 황량하게 하고 있다. 그런 광신자의 행위는 마땅히 법적인 제재를 받아야 하겠지만 나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훼손된 단군상이 플라스틱 제품이라는 사실이다.

국조(國祖)단군을 숭앙(崇仰)한다는 사람들이 공해물질인 플라스틱으로 단군상을 만들어 설치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설치된 단군상이 어떤 역사적 근거에 입각해 조성됐는지도 의문스럽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최초로 단군상을 그림으로 그린 이는 신라의 화성(畵聖)솔거였다. 구한말(舊韓末)의 역사교과서에 실린 단군그림도 그렇거니와 오늘날의 국사교과서에 게재된 그림도 모두 솔거그림을 근거로 한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것은 단군의 동상 또는 조각을 할 경우 지켜야 할 어떤 준칙(準則) 같은 것은 제시해 주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번에 세워진 단군상을 보면 그런 준칙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고 아니 할 수 없다. 단군상이 풍기는 이미지가 종래 우리가 솔거의 그림에서 느꼈던 것과는 전혀 판이하기 때문이다. 이런 설치물을 공공장소에 세운다는 것은 비단 몰골 사나운 플라스틱 제품이라는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또다른 차원에서 역사왜곡의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라는 것을 지적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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