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희로 독점수기 연재] 14. 어머니 미움을 넘어섰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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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4 나의 어린 시절

"조센징와 가와이소, 나제카토 이우토 지신노다메니 오우치가 빼샹코 빼샹코 야이 조센징 야반징(조선인은 불쌍해, 왜냐하면 지진때문에 집이 폭싹 폭싹 야이 조선인 야만인). "

칠순이 지난 지금도, 리어카를 끄는 어머니를 향해 돌을 던지며 일본 아이들이 부르던 그 노래를 잊을 수 없다. 그렇게 놀림을 당하면서도 어머니 손을 잡고 시미즈(淸水.시즈오카현의 소도시)국민소학교(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땐 너무 기뻐 하늘을 날아갈 것만 같았다.

외톨이로 지내던 나는 미운 일본 아이들이었지만 친구가 생긴다는 게 그렇게 좋았다.

두 살 많은 미요코(みよ子)누나가 툭 하면 학교가기 싫다고 우는게 이해가 안 됐다.

일본인 친구들이 놀려도 바보처럼 꾹 참고 학교에 다니던 내게 인생의 방향을 틀어놓게 되는 큰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3학년 때 교실에서 일어난 '도시락 사건' 이다.

찢어지게 가난하던 시절이라 누나는 늘 점심을 굶었지만 어머니는 장남인 내게만은 꼬박꼬박 도시락을 챙겨주셨다. 물론 꽁보리밥에 반찬이라곤 '우메보시(매실장아찌)' 하나뿐이었지만…. 어느날 일본인 급우 2명이 내 도시락을 보고 놀려대다 그만 엎어버리고 말았다.

잠자코 지내던 나는 그 순간 울컥 화가 치밀어 달려들었다.

다른 급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2대1로 싸우고 있는데 도야(土谷)선생님이 들어와 이유도 묻지 않고 나만 죽도록 때리는 것이었다.

얼마나 아팠던지 그만 바지에 똥을 싸고 말았다.

그 이후로 아이들은 나만 보면 "키타나이 조센징(더러운 조선인)" 이라고 놀려댔다.

아이들은 '곤키로(권희로)' 라는 조선이름을 가진 나를 빚대 이런 노래까지 만들어 불렀다.

"오테라노 가네가 곤-. 모즈가 키-. 야이 조센징 야반징(절의 종소리가 곤-. 까치는 키-. 야이 조선인 야만인). "

학교가 싫어진 나는 자퇴를 하고 집에서 혼자 빈둥거리며 놀았다. 그런 상태로 세월을 보내다 12세 되던 해 도쿄 아오야마(靑山)의 일본인 야채가게에 점원으로 들어가게 됐다.

어린 나이였지만 나 때문에 어머니와 계부 사이가 나빠지는 게 마음에 걸려 내린 결정이었다.

처음 나를 도쿄로 떠나보내던 날 시미즈 역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시던 어머니의 얼굴은 내 평생 가슴 속에 남아있다.

월급도 없이 먹이고 재워주는 게 전부였지만 어머니에게 짐이 되지 않겠다는 생각에 열심히 일을 했다.

그러나 매운 게 먹고 싶어 마늘을 하나 몰래 주어먹은 게 화근이 돼 주인한테 호되게 야단을 맞고 신주쿠(新宿.도쿄의 중심가)역으로 도망가 시미즈의 어머니 곁으로 되돌아갔다.

그 후 나는 과자점,가구점, 인쇄소, 세탁소, 연탄가게 점원 등 안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잡일을 전전했지만 어느 곳 하나 오래 붙어있을 수가 없었다.

계부가 버티고 있는 집에는 가기 싫고 그렇다고 마땅히 갈 곳도 없어 빈 헛간이나 들판에서 가마니 한 장 깔고 자기도 하고 시미즈 역 벤취를 내 방처럼 이용하기도 했다.

배가 고프면 아무 밭에나 들어가 무나 당근 같은 것을 뽑아먹었다. 영낙없는 부랑자 생활이었다. 일본경찰과의 악연은 그런 뿌리없는 생활을 하던 13살때 시작됐다. 시미즈 역 벤취에서 자고 있는 나를 경찰이 발로 차 깨워 경찰서로 끌고 갔다.

"이놈의 새끼, 무슨 잘못을 저질렀어. 솔직히 말해. "

나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어머니를 부르며 엉엉 울기만 했다.

어머니가 나를 데리러 유치장에 찾아왔을 때 일본경찰은 "너희 조센징들은 일본 덕분에 잘 살고 있으니 늘 고맙게 생각해야 해" 라며 내보내줬다. 그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그때마다 어머니는 그저 머리를 숙이며 "모우시와케아리마셍(죄송합니다)" 이라고만 했다.

어머니와 계부 사이에 남동생 야스오(康男)가 태어나면서 나는 계부와 더욱 멀어지게 됐으며 급기야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가출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집을 나와 들판에서 잠을 자며 "이 다음에 반드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같은 사람이 돼야지" 라고 다짐하곤 했다.

민족의식이나 역사의식이라곤 눈꼽만큼도 없었던 나는 도요토미가 임진왜란 때 우리 나라를 침략한 인물인 줄도 모르고 천민 출신에서 천왕 다음가는 '다이고(太閤.오늘날의 총리)' 자리에 오른 위대한 인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립의 꿈을 안고 저 멀리 시모노세키(下關)까지 간 것은 내 나이 14세 때였다.

나는 그곳에서 관부(關釜)연락선 '곤고마루(金剛丸)' 를 보며 "아, 어머니가 이 배를 타고 일본으로 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조선' 이란 나라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히로시마(廣島)현 오노미치(尾道)란 곳에서는 운좋게 화물선 식당에서 일하는 기회를 잡았지만 나이가 너무 어린게 들통나 쫓겨나기도 했다.

그때 친절한 선장이 건네주는 얼마 안되는 돈을 들고 나고야(名古屋)로 가 역 대합실에서 지내며 짐꾼 일을 했다. 그때 난 어느 변두리 영화관에 갔다가 의자 밑에 떨어져 있던 싸구려 손목시계를 줏어 차고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도둑으로 몰려 나고야 경찰서로 끌려갔다.

그러나 이 일이 나의 청소년기를 형무소에서 보내게 되는 시발점이 될 줄이야 꿈에도 생각치 못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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