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철의 중국 산책] 중국, 세계 미디어의 새 질서를 꿈꾼다

중앙일보

입력

2009년 10월 9일 오전 9시20분 베이징 인민대회당 3층의 골든 홀(金色大廳).
무대 중앙 한 가운데엔 '世界媒體峰會'란 큼지막한 한자가 쓰여 있다.
그 아래엔 한자보다 작은 영문인 'World Media Summit' 이 보인다.
세계 69개국 170여 개 매체의 400여 언론인이 참석한 '세계미디어정상회의' 개막식이 열리는 현장이다.

지난 7월 초에도 인민대회당에선 '세계싱크탱크정상회의'가 열린 바 있다.
포럼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중국은 최근 '정상회의'를 뜻하는 '峰會'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세계 미디어들의 모임에도 '정상회의'라는 말을 붙였다.

이윽고 방송과 통신, 신문, 인터넷 등 세계 각국을 대표하는 400여 언론인,
그리고 300여 취재진이 웅성거리던 현장은 날렵한 몸매의 진행요원들이 상황을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숨소리도 멎은 듯 고요 속으로 빠져 든다.
중국의 지도자 출현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아니나 다를까. 13억 중국의 1인자인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입장한다.
참석자들의 갈채에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후 주석은 손을 들어 답한다.
그러자 사회를 맡기 위해 단상에 오른 사람은 리충쥔 신화통신사 사장이다.
장관급 인사가 직접 사회를 보는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떨리고 있다.

리 사장에 따르면 세계미디어정상회의는 인민대회당의 골든 홀이 새롭게 단장한 뒤 첫번째로 치르는 행사다.
게다가 영광스럽게도 후 주석이 직접 개막 연설자로 나섰다는 것이다.
중국이 이번 행사에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는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물론 이번 행사는 지난해 8월 베이징올림픽 때 신화사를 방문한
루퍼트 머독 미국 뉴스코퍼레이션 회장과 토머스 컬리 AP 통신사 사장,
로이터 등 세계의 9개 주요 언론사들이 의기투합해 열리게 된 것이다.
엄청난 행사 비용을 신화사 혼자 부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1931년 설립된 신화사가 78년 역사 가운데 치르게 된 최대 규모의 행사다.

사실 중국 언론은 '중국 공산당의 후설(喉舌, 목구멍과 혀)'로 불리며
서방 언론들로부터는 제대로 언론 대접을 받지 못한다.
중국 언론이 서방 언론과 포럼을 개최하고 싶어도 미국 언론은 '중국 언론을 아예 언론이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행사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 행사가 가능했던 것은 크게 세 가지 점 때문이다.
첫째는 달라진 중국의 위상이다.
1997년의 아시아금융위기, 2008년 세계경제위기 등 위기가 터질 때마다 구세주로 등장한 중국의 파워가 투사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베이징올림픽 때도 베이징엔 100여 개 국가의 정상들이 집결해 후진타오 주석과의 알현(?)을 위해 긴 줄을 서야 하지 않았던가.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조차 30분 간 줄을 서야 했음은 물론이다.
이젠 중국이 부르는데 오지 않을 강심장을 가진 나라가 세계에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세계 언론계의 거물인 루퍼트 머독의 중국에 대한 야심이다.
중국 진출을 위해 1990년대 초반부터 열심인 머독의 개인적 야심, 그리고 이에 따라 이번 행사에 적극 지원을 보낸 머독의 열성이 이번 대회 개최를 가능하게 한 중요한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중국의 눈으로 세계를 보겠다는 중국의 결심'이다.
이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중국에서 열린 미디어 행사로서는 최대이자, 아마 세계적으로도 미디어 분야의 최대 행사가 베이징에서 열릴 수 있었던 것은 중국 당국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특히 개막식에 후 주석이 직접 나와 연설을 하는 것 자체가 이번 행사에 중국이 얼마나 많은 신경을 쓰고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후 주석은 지난해 9월 인민일보를 방문한 자리에서 "중국의 국가 위상에 걸맞게 언론 매체의 세계화 역량을 강화하라"고 지시한 바 있다. 그리고 이같은 지시가 나온지 얼마 후 중국이 미디어 발전 방안으로 약 450억위안(약 9조원)을 쏟아 붓기로 했다는 소식이 이어졌었다.

후 주석은 약 17분 간에 걸친 개막식 연설에서 "중국 정부가 중국 미디어와 외국 미디어의 협력을 지원하겠다" "관련 법규에 따라 외국 매체의 권익을 보장하겠다" 등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후 주석이 이번 세계미디어정상회의를 통해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번 대회가 다음과 같은 세 가지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한 대목에 응축돼 있었다.

첫째는 세계 미디어 간의 협력에 도움이 되고,
둘째는 글로벌 미디어 업계의 건강하고 질서있는 발전에 도움이 되고,
세째는 각국 인민의 상호 이해와 우의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얼핏 보면 공자 말씀 같지만 핵심은 둘째의 '건강하고 질서있는'(健康有序) 발전에 있다. 행사 후 만난 중국 장관급 고위 인사의 해석에 따르면 이 '질서있는' 발전은 바로 '서방 중심의 세계 미디어 시각'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즉 세계의 다양한 시각이 서방 일변도의 시각을 대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바로 '중국의 눈으로 세계를 보겠다'는 결심을 말한다.
세계 뉴스의 80% 정도가 서방 미디어에 의해 제공되는 현실에 대한 도전이다. 세계 미디어 업계에 새로운 질서가 도래하기를 바라고 또 그렇게 하기 위해 투쟁하겠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쉽지 않은 싸움일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이번 세계미디어정상회의 개최를 시작으로 그 싸움에 뛰어 들었다.
중국공산당은 과거 힘겨운 투쟁을 벌일 때 곧잘 '道路是曲折的 前途是光明的'라는 말을 썼다고 한다. '가는 길은 구불구불 험난하지만 미래는 밝은 것이다'로 해석할 수 있다.
이번 세계미디어정상회의는 공동선언문을 채택했지만 다음 개최지는 정하지 못하고 10일 폐막됐다. 힘겨운 전도를 예상케 한다.
그러나 중국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자 하는 중국의 노력은 가속화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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