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바람의 섬 사내들 삶은 느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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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호 16면

‘Bitter is wind’(바람이 매서워도).
900년께 바이킹의 침략에 시달리던 아일랜드 한 수도원의 벽에 새겨진 시의 제목이다. 바람이 강하고, 파도가 몰아쳐도 바다로 나가서 바이킹과 싸우겠다는 내용이다.
스코틀랜드 북쪽 오크니 제도 커크월의 오크니 골프장에서 문득 이 시가 생각났다. 바람이 매섭기도 했지만 이곳이 바이킹의 땅이기도 해서다.

성호준 기자의 스코틀랜드&웨일스 투어 에세이 ① 오크니

오크니는 875년 바이킹에 점령돼 약 600년간 영국 및 유럽 공략의 기지로 사용됐다. 1472년 스코틀랜드 땅이 됐는데 사연이 재미있다. ‘빈털터리 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노르웨이·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1세가 딸 마가렛을 스코틀랜드 제임스 3세에게 시집 보내면서 지참금을 주지 못해 임시로 오크니와 셰틀랜드를 담보로 맡겼다가 소유권도 바뀌었다.

오크니 골프장의 라운드에서 동반자인 앨런(왼쪽)과 리가(가운데)가 기자의 퍼팅을 지켜보고 있다. 바이킹의 후손으로 덩치가 큰 두 사내는 바람에 무척 강한 스윙을 가지고 있었다.

지참금 몇 푼에 땅을 팔아버린 빈털터리 왕을 미워하면서도 아직도 이곳 사람들은 바이킹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특히 지참금 4만8000플로렌스의 가치가 매겨진 오크니 사람들은 “1만2000플로렌스였던 셰틀랜드보다 4배의 가치가 있다”면서 뿌듯해 한다.

바람은 풍력발전기를 빠르게 돌리고 있었다. 옛 바이킹의 땅을 순례하다 커크월 항에 정박한 노르웨이 국적 범선이 파도에 출렁거리는 모습이 멀리서도 생생히 느껴졌다.
날아가려는 듯한 모자를 누르며 함께 라운드하기로 한 덩치 좋은 두 사내에게 물었다.
“이런 강풍에 정말 골프를 할 수 있나요?”
“이 정도는 일상적인 바람인데요….”

바이킹의 후손들에겐 일상적일지 모르겠지만 일반인에겐 보통 바람은 아니었다. 공항에서 들어올 때 파도는 방파제를 넘어와 내가 탄 자동차를 세차게 내리쳤다.
스코틀랜드 골프엔 머피의 법칙이 있는 것 같다. 왜 첫 홀은 항상 맞바람인가.

“Bitter is wind !” 마음속으로 아일랜드 시를 되뇌며 어드레스를 했다. 맞바람에 다운스윙이 제대로 안 됐다. 3번 홀은 뒷바람이어서 만족스러운 티샷을 했지만 두 번째 샷을 할 때 누군가 뒤에서 갑자기 나를 미는 것 같은 느낌에 중심을 잃었다.

바람에 나자빠진 나를 보면서 바이킹들이 짓궂게 킬킬 웃었다. 동반자인 앨런과 리가는 보기엔 아름답지 않았지만 바람에는 안성맞춤인 스윙을 가졌다. 특히 럭비선수 출신의 리가는 바람 부는 링크스의 제왕이었다. 미식축구 선수의 패드를 찬 것 같은 자신의 어깨보다 1.5배쯤 넓은 어드레스에, 짧은 백스윙, 도끼로 오른쪽 다리를 내리찍는 듯한 스윙으로 바람을 쪼갰다.

아일랜드인들은 ‘bitter is wind’라는 시를 수도원 벽에 새기면서 의지를 다지고, 성호를 긋고, 신의 축복을 구하고 나서야 험한 바다에 뛰어들었겠지만 바이킹에게 그런 바다는 일상이었다. 아일랜드인들도 독하기로 소문났다. 그러나 그래봐야 그들의 수도 더블린은 바이킹이 세운 도시라고 한다. 나도 다짐을 하고 나갔지만 바이킹의 후예들과는 처음부터 상대가 안 되는 게임이었다.

바람이 강한 링크스의 핀은 짧은 것이 일반적이다. 이곳은 아예 날아가지 못하도록 톱니바퀴 모양의 요철을 만들어 끼웠다.

오크니 섬엔 나무가 거의 없다. 바람을 막아줄 건물 옆에만 자란다. 닭도 거의 없다. 한때 양계업을 하려고 많은 닭을 들여왔는데 하룻밤 새 다 날아가 버렸다. 날지 못하는 새들을 날게 하다니, 이곳의 바람은 불가능도 가능케 한다. 인근의 셰틀랜도 제도에는 세계 최대의 풍력발전소 ‘바이킹’을 세울 예정이란다. 스코틀랜드 전력의 3분의 1을 담당할 규모다.

리가가 “시속 130마일의 바람이 불 때는…”이라고 무표정하게 말할 때 몸이 오싹했다. 130마일이면 타이거 우즈가 드라이버를 있는 힘껏 휘두를 때의 헤드 스피드다. 바이킹들은 그 무서운 자연의 속도 속에서 산단 말인가.

후반으로 접어들자 바람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이 코스는 러프도 길지 않고 나무도 없다. 해저드도 위협적이지 않고 전장은 5411야드에 불과하다. 1889년에 만들어진 이 코스는 거의 100년 동안 별로 변하지 않았다.

막판 나는 리가보다 공을 멀리 쳤다. 험상궂어 보였던 리가는 바람이 사라지면서 인상 좋은 옆집 아저씨로 바뀐 듯했다. 그가 변한 것이 아니고 내가 그를 마음대로 생각한 것이지만, 어쨌든 그는 바람이 멈추자 드라이버 없는 존 댈리였다. 난 버디를 2개 잡아 약간 우쭐하기도 했다. 바이킹들은 나의 버디 버팅이 들어가자 “바르디”라면서 기뻐했다.

이들의 발음은 영국과 달랐다. 스코틀랜드와도 확실히 다르다. R을 L처럼 발음하고 모든 단어 뒤 억양이 올라간다. 토박이들이 ‘ORKNEY’를 말할 땐 ‘올커니’라고 하는 것 같았다.

이곳의 그린피는 20파운드다. 종일권을 25파운드에 판다. 5만원 정도다. 오크니 골프장보다 1년 늦게 만들어진 30분 거리의 라이벌 코스 스트롬네스의 그린피도 같다.

북위 59도에 위치한 오크니 제도의 여름엔 밤이 거의 없다. 자정에 열리는 골프대회도 있다. 한국의 열혈 골퍼들은 5만원만 내고 하루 6라운드를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리가는 “그런 사람은 여기 없다”고 했다. “몇 년 전 한 사람이 하루에 오크니의 2개 코스와 셰틀랜드의 2개 코스를 돌며 4라운드를 한 적은 있지만 그렇게 급하게 살아야 하나”라고 앨런이 되물었다.

앨런의 8년 된 타이틀리스트 드라이버의 헤드 커버는 거의 다 해어졌다. 리가의 클럽도 5년은 되어 보였다. 앨런은 “이곳의 삶은 천천히 간다”고 말했다.

우리를 안내했던 데이비도 그런 말을 했다. “북해 석유로 산업도시가 된 고향 애버딘의 삶이 너무 빠르고 팍팍해져 이곳에 산다.”

오크니가 자랑하는 싱글몰트 위스키 하일랜드 파크는 아직도 기계를 쓰지 않고 사람이 직접 보리를 말린다고 한다. 돈은 더 들어도 옛날처럼 만들어야 진짜 맛을 지킬 수 있어서다. 바람은 빠르지만 오크니 바이킹의 삶은 느리다.

라운드 후 클럽하우스에서 리가는 “아무래도 전장을 늘리고 나무를 심는 등 코스를 개조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아름답고 전통 있는 코스를 왜 바꾸냐”고 묻자 앨런은 “코스가 너무 짧고 해저드가 적어 장비 발전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답했다.

그렇긴 했다. 짧은 파4 홀에선 그린 주위에서 퍼터로 두 번째 샷을 하는 경우가 많을 것 같다. 옆 홀로 티샷을 해도 별 어려움 없이 파 온이 가능했다. 사실 나의 버디 중 하나도 그 덕을 본 것이었다. OB 말뚝이 병풍처럼 둘러처져 있는 한국에서라면 “OB티 앞에 있습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홀에서, 골퍼의 실수를 용서하지 않는 변별력 높다는 이른바 명문 코스라면 공을 잃어버리고 더블보기, 트리플 보기를 했을 홀에서 난 버디를 잡았다.

120년 된 골프장을 파헤치고 억지로 늘리는 것이 별로 탐탁하지 않았다. 그냥 있는 그대로 두면 안 될까. 실력이 처지는 사람도 버디를 잡으면 좀 어떤가, 꼭 잘 친 샷만 평가를 받아야 할까. 때론 강풍 속에서 고생한 골퍼에게 따뜻한 버디로 위안을 주면 안 될까.

오크니 바다에서 나는 청어 요리는 내 혀를 감았고 오크니 땅에서 나는 위스키 하일랜드 파크는 나의 마음을 감았다. 하일랜드 파크는 스칸디나비아에서 온 윤센이 만들었으며 스웨덴에서 가장 많이 팔린다고 한다. 이 바이킹의 술을 혀에 댈 때마다 오크니의 강풍을 맞는 것처럼 몸이 찌릿찌릿했다. 그들과 잔을 부딪치며 말했다. “Bitter is wind, bitter is sweet”(바람은 거칠고, 거친 것은 달콤하다). 앨런이 “이제야 오크니와 바이킹의 맛을 좀 아는 것 같다”며 웃었다.

몽롱한 위스키 향기 속에서 ‘오크니의 하늘보다 더 파란 것은 지구에서 찾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바이킹이 된 것 같았다. 롱십을 타고 고대 바이킹의 신 오딘이 나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오크니 코스를 그대로 두라.” 앞에 앉은 바이킹들은 영문도 모른 채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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