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환의 모스크바광장] 벤츠타고 '국산품 씁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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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요즘 모스크바 중심가엔 국산품 애용 광고가 즐비하다.

러시아의 국민가수 알라 푸가초바까지 등장, "국산품이 외제보다 못할 게 없다" 고 강조한다.

개혁 10여년이 지나도록 엉망진창인 러시아 경제를 애국심에 호소해 되살려보려는 것이다.

시민들의 호응은 비교적 좋은 편이다.

초콜릿.유제품 등 식료품과 일부 잡화류를 중심으로 러시아제 상품들의 시장점유율이 오르고 있다.

국세청도 올해 납세율이 예상보다 높아졌다고 희희낙락이다.

그러나 세무경찰의 관용차를 비롯, 주요 장관들은 예외없이 벤츠.볼보.BMW 등 최고급 외제차를 타고 다닌다.

심지어 교통경찰의 순찰차도 외국산이다.

보리스 옐친 대통령부터 관용차를 소련제 리무진인 '질' 에서 벤츠와 캐딜락으로 바꾼 터이니 아래 사람들만 탓할 일도 아니다.

국산품 애용을 부르짖는 푸가초바가 벤츠.캐딜락 등 외제차만 타고 다니는 것은 씁쓸한 코미디다.

러시아는 외채상환금이 부족해 새롭게 외채도입 협상을 하고 있는 나라다.

게다가 장관들의 공식적인 평균 월급이 2백달러 미만인 처지다.

그들이 관용차로 비싼 외제차를 굴리고 있으니 아무래도 자연스러운 모습은 아니다.

러시아의 고관들은 밤이 되면 마피아와 같이 일한다는 얘기까지 있다.

최근 뉴욕은행 돈세탁 사건은 그런 얘기를 더욱 신빙성 있게 해주고 있다.

전직 국세청장이 세금미납자로 분류됐다는 것 정도는 큰 뉴스도 되지 않을 정도로 러시아 지도층의 부패는 누구나 알고 있는 공지사항과 다름없다.

얼마전 모스크바 마네즈 지하 쇼핑몰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경찰당국은 '외제품 사용을 혐오하는 소비자단체' 를 용의 선상에 올렸다고 한다.

문제의 백화점이 크렘린 가까이 자리잡고 초호화 외제품을 파는 곳으로 악명 높았기 때문이다.

러시아 지도층의 터무니없는 행동에 대한 서민들의 인내가 마침내 한계에 달했다는 얘기일까.

김석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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