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의 세상보기] 詩로 문 여는 정계개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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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국 정치에서 99년 늦여름처럼 정계개편을 위한 정중동 (靜中動) 의 움직임이 노골적으로 (?) 드러난 적도 드물다.

당마다 제2창당이요, 파 (派) 마다 세력형성이다.

입당파와 민산 (民山) 파, 진보당과 보수당, 지역당과 전국당이 제각기 암약 중이니 장차 당 간판 못 달면 불출에 들까 무섭다.

외국의 정당들은 백년을 넘어도 까딱없건만 한국의 정당들은 수명이 10년의 절반 밖에 안돼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한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인재를 영입하기 위해 당파마다 불러대는 '러브 콜' 과 이에 응하는 답시 (答詩)가 우리의 전통 가락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어 그런대로 듣기는 좋다는 것이다.

'한국의 정계개편은 시로 시작된다' 는 말은 그래서 생긴 것 같다.

물질이 판치고 사기가 횡행 (橫行) 하는 시절에도 일말의 시심 (詩心) 은 살아 있다고 치고 그들의 노랫소리를 한번 들어보자. 먼저 기선을 제압한 어느 당의 노래. 내벗이 몇인가 하니 신지식인과 전문가라/중산층 서민층에 '알파파 (派)' 반갑고야/두어라 이 다섯 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그러나 정치에 입문하는 것은 언제나 모험이며 도박이다.

거기서는 싸우고 무리 짓는 일만 배우게 되기 쉽다.

'군자 (君子) 는 씩씩하되 다투지 않으며, 무리 짓되 편당하지 않는다' 는 공자 (孔子) 의 군자론은 그래서 나왔다.

그러나 햇병아리들이 이 말씀의 뜻을 제대로 알까. 벌써 신규 참여세력인 알파그룹이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자 기성 정치권인 '오메가 그룹' 이 위기를 느끼고 세게 반격한다.

알파는 시작이고 오메가는 끝이니 이대로 별 볼일 없이 끝날 수는 없다는 것이 오메가파의 생각인 것 같다.

오메가는 끝났다고 알파야 웃지마라/겉이 오메간들 속조차 오메가랴/겉만 알파고 속이 오메가이기는 너뿐인가 하노라.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옥석 (玉石) 을 가리지 않겠다는 분별없는 러브 콜을 당파마다 마구 불러젖히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노래까지 들린다.

개혁인들 어떠하며 보수인들 어떠하리/개혁적 보수와 보수적 개혁이 얽어진들 어떠하리/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새 천년을 누리리라. 제일 안타까운 시선을 받는 곳이 '창파 (滄派) 그룹' 인데 여기에 바치는 노래는 이렇다.

3金이 설치는 곳에 노장청 (老壯靑) 아 가지마라/보스 정치 지역 할거 인재의 무덤이니/창파에 좋이 씻은 몸 더럽힐까 하노라. 또 이렇게 말리는 사람도 있다.

늙은 피 설치는 곳에 젊은 피야 가지 마라/성낸 늙은 피 선홍 (鮮紅) 을 새오나니/창파에 좋이 씻은 몸 더럽힐까 하노라. 이 노래는 음흉한 늙은 피가 도사린 곳을 경계하라는 젊은 피에 주는 충고지만 정작 늙은 피들의 생각은 다른 것 같다.

늙은 피 검다 하고 젊은 피야 웃지 마라/모진 신산 (辛酸) 헤쳐 가며 어르신 된 우리다/아마도 겉 젊고 속 늙은 이는 너뿐인가 하노라. 늙은 피의 하소연은 그런대로 근거가 있다.

1999년은 유엔이 정한 노인의 해, 왜 하필 노인우대의 해에 노인들을 축출하려는고?

어쨌든 새 피를 부르는 소리는 너무 달콤하다.

나는 네가 좋아서 순한 양이 되었지/풀밭 같은 너의 가슴에/내 마음은 뛰어 놀았지/내곁에 있어주 내곁에 있어주/할말은 모두 이것뿐이야. 이 러브 콜에 미혹된 사람들이 오늘도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한다.

정당은 정치 이상 (理想) 과 정견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모인 단체다.

하지만 당 간판 새로 달기에 쫓아다니다 보면 변덕쟁이 또는 작심삼일 (作心三日) 의 사람이 되기 쉽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이합집산이 이리 무성하다면, 그렇다면 먼 훗날 그대와 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리.

김성호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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