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청진동 해장국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조선조 중기 이후 서울의 한복판이랄 수 있는 청진동에 다양한 계층의 술집들이 번성하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육조 (六曹) 거리와 육의전 (六矣廛) 거리가 교차하는 지리적 여건이다.

쉽게 말하면 정치와 경제가 만나는 자리였다는 뜻이다.

그래서 서민 상대의 목로주점보다 먼저 생긴 것은 관리나 부유층만을 고객으로 하는 요정급의 술집이었다.

중학천변을 중심으로 처음 생겨난 고급술집들은 고관과 부유한 상인들의 접선 (接線) 장소로 즐겨 이용됐다.

그러나 육의전에 드나드는 서민들은 잠시 쉴 곳이 마땅치 않았다.

특히 고관대작들의 행차가 빈번해 그때마다 서민들이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떼지어 피신하다 보니 장사하는 데도 방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하나 둘씩 생겨난 것이 목로주점, 곧 해장국집이었다.

고관대작의 행차가 떴다 하면 해장국집들은 미어터지기 일쑤였다.

해장국의 맛이 호평을 받으면서부터 하급관리들의 발길도 잦아졌다.

청진동 해장국이 갈수록 크게 인기를 모은 데는 또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리 전통음식인 해장국은 지방에 따라 재료와 끓이는 방법이 저마다 달라 그 맛도 제각각이었다.

가령 서울지방의 해장국은 쇠뼈를 푹 고아 끓인 국물에 된장을 풀어넣고 콩나물.무.배추.파 등을 넣어 끓이다가 선지를 넣고 다시 한번 푹 끓여 다소 쌉쌀한 맛을 내는 게 특징이다.

그러나 육의전에 드나드는 사람들도, 해장국집 주인들도 서울사람만은 아니었다.

'최대공약수적인 맛' 의 창출이 필요했고, 각처에서 모인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다 보니 청진동 특유의 해장국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현대사회에 와서도 청진동은 서민의 애환 (哀歡) 이 깃들인 곳이요, 해장국은 술꾼들의 친근한 벗이었다.

개발에 밀려 지난날의 성황을 찾아보기는 어려웠지만 아직도 그 해장국 맛을 잊지 못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금 청진동 일대 2만3천여평을 재개발하는 문제를 놓고 주민과 관할 구청이 또다시 마찰을 빚고 있다 (본지 9월 8일자) .서너해 전 청진동 일대가 재개발되면 그 지하에 1만8천여평의 공간을 만들어 '해장국 타운' 을 조성할 계획이라더니 지금은 청진동 해장국이 명맥을 유지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재개발을 하느냐 않느냐의 문제다.

하기야 그 맛만 계속 살려낼 수 있다면 장소야 무슨 문제인가.

다만 현대화에 밀려 유서깊은 '명물' 들이 하나씩 둘씩 자취를 감추는 게 안타깝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