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고교시험 쉽게 출제하기 -이렇게 생각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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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최근 일부 고교의 '쉽게 출제하기' 시비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교육부는 전인교육의 정착을 위해 내신 절대평가 제도는 유지돼야 한다는 입장이나 일선 학교에서는 우리 사회와 대학의 이기주의적 풍토로 재시험 등 엉뚱한 문제가 우려된다고 지적한다.

◇ 한교사의 辯 -박상준 배재고 교사

우리 학교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교육부의 정책들은 일선 고교의 성적 올려주기, 학생들의 공부 안하기, 재시험 파동, 학교수업의 파행 같은 문제들을 계속 발생시키고 있다.

성적 올려주기로 촉발된 이런 문제들은 물론 교사들의 교육적 소신과 평가권을 스스로 포기하고 시험을 쉽게 낸 것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이것은 교사의 탓만은 아니고 오히려 우리의 문화와 학교풍토가 그렇게 하도록 강요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학교를 평가하는 기준은 일류대학에 입학시킨 학생 수이다.

이에 따라 각 학교는 자기 학생들을 대학에 더 보내기 위해 성적을 올려주는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

이런 경쟁은 학생의 시험부담을 더 가중시킬 것이다.

내신의 변별력과 신뢰도가 없어져 대학에서는 객관적 기준이 될 새로운 시험 (논술.본고사.구두시험 등) 을 실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교사의 평가과정에 교장의 통제와 학부모들의 압력이 강하게 작용한다.

실례로 지난 기말고사에서는 교감이 평균 70점이 되도록 시험을 출제토록 하라고 교사들에게 종용했다.

수행평가의 경우 교장의 압력으로 최고와 최저의 점수차가 약 10점 정도밖에 안돼 평가의 의미가 없어졌다.

게다가 학부모들도 왜 다른 학교보다 시험을 어렵게 내 자기 자식이 피해를 보게 하느냐고 항의하는 경우도 많다.

한편 성적 올려주기가 공부하지 않는 학생들을 더 증가시켰지만, 공부 안하는 풍토의 근본원인은 유급제도가 없기 때문이다.

공부를 전혀 안해도 출석일수만 채우면 졸업한다.

유급제도가 없다면 수업시간에 자거나 장난치고 떠드는 학생들을 통제할 수단이 거의 없다.

이러다 보니 학교에서의 수업과 평가가 제대로 이뤄질 수 없다.

이런 제도와 풍토속에선 성적 올리기 위한 시험출제는 불가피하다고 보나, 그 폐해는 바로 학생들에게 돌아간다는 점에서 하루빨리 지양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교육환경의 근원적 개선과 함께 이뤄질 수 있음은 물론이다.

◇ 당국자의 말 -고원영 교육부 학교정책과장

일부 고교의 '고1 쉽게 출제하기' 는 우리 선생님들을 슬프고 곤혹스럽게 만든다.

이런 현상이 발생하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크게 보면 학업성취도 (수.우.미.양.가).과목별 석차 중 학업성취도만을 반영하려는 대학의 행정편의주의, 우리 학교.지역만 중시하는 잘못된 교육열과 집단이기주의, 출제에 참고할 자료의 빈곤과 활용 미흡, 출제자의 교육철학 부족을 지적하고 싶다.

그러나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고1 쉽게 출제하기' 는 우리 교육발전을 위해 꼭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본다.

모든 교육활동의 기본은 국민적 합의로 설정한 교육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다.

이를 제대로 달성했는지를 측정하고 미래의 교육목표를 정하기 위해선 정확한 성취도 평가가 핵심이다.

그래야만 학교의 학생평가가 대학입학 전형자료로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리고 학생들 자신도 학교의 평가를 믿지 못해 결국 학교교육의 권위와 신뢰는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실추될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아야만 한다.

그 해법으로는 우선 학생.학부모.지역사회는 선생님의 학생 평가권을 존중해야 한다.

선생님은 교육과정에 고시된 성취기준대로 출제.평가하면 되고 학생.학부모는 간섭하면 안된다.

대학은 힘들더라도 당분간 학업성취도와 석차를 동시에 반영해 고교 교육정상화를 도와야 한다.

교육행정기관은 문제은행 등 평가지원체제를 강화해야 한다.

그러나 이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출제자의 교육적 양심이다.

문제집 베끼기.기출문제 다시 내기.지나치게 쉽게 내기.미리 알려주기.재시험 보기 등은 어떤 변명으로도 용납될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다.

궁극적으로는 학교생활기록부의 석차 난이 필요없을 정도로 학업성취도의 타당도.신뢰도가 높아지는 날이 결국 교권이 신뢰받고 존중되는 날이 될 것이다.

행정기관.학부모.지역사회는 선생님들을 더 이상 흔들지 말자. 학교가 무너진다.

최대의 피해자는 우리 아이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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