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은닉처’ 스위스 이젠 옛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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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의 영세 중립국 명성이 흔들리고 있다. 중립국의 독자성을 내세워 국제 관례를 외면하는 태도가 더 이상 국제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스위스도 이에 맞춰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스위스는 그동안 좌·우익에 치우치지 않은 자유로운 분위기와 예금 비밀주의로 정치 망명객이나 재산 은닉자들의 이상적인 도피처가 됐다. 그러나 스위스 은행들이 미국 등에 탈세 혐의자의 예금 내역을 통보하며 비밀주의가 훼손됐다. 또 세계적인 영화 감독 로만 폴란스키가 32년 전 미국에서 발생한 미성년자 성폭행 혐의로 스위스 경찰에 체포되면서 ‘망명객의 낙원’도 옛말이 됐다. 블룸버그 통신은 6일 “스위스가 중립주의를 지키려고 애쓰고 있으나 지난해 금융위기 이후 거세진 국제사회의 압력을 회피하기 어렵게 됐다”고 보도했다.

스위스는 1815년 빈 회의에서 당시 강대국인 오스트리아·프로이센·프랑스·영국·러시아 등의 보장을 받아 영세 중립국이 된 뒤 정치적 자유를 허용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러시아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은 고국에서 탄압을 받자 스위스로 망명해 사회주의 혁명의 기틀을 마련했다. ‘모던 타임스’ 등의 작품을 통해 현대사회의 비인간성을 고발한 영화감독 겸 배우 찰리 채플린도 1950년대 마녀사냥식 반공주의인 매카시즘으로 미국에서 추방되자 스위스에 정착했다. 원유 현물시장을 창시해 ‘상품시장의 왕’으로 불리던 억만장자 마크 리치가 83년 조세 포탈, 이란과의 불법 거래 혐의로 미 사법당국의 추적을 받자 도피한 곳도 스위스였다.

이런 스위스가 미국의 요청에 따라 지난 30여 년간 스위스를 수시로 드나들었던 폴란스키를 전격 체포했다. AP통신은 “폴란스키 체포는 스위스 정부가 중립주의보다 국제법을 중시했음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스위스에서는 중립주의 훼손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장 제글러 전 유엔 인권문제 자문역은 “스위스 정부는 미국이 요구하면 무엇이든 24시간 안에 가져다 대령할 것이다”며 폴란스키 체포를 비판했다. 그의 체포는 강제 송환을 요구하는 미국과 석방을 요구하는 프랑스·폴란드의 외교전으로도 비화했다. 최근에는 한스-루돌프 메르츠 스위스 대통령이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의 아들 부부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해 스위스의 정치적 순수성을 훼손했다는 비판까지 가세했다.

여기에다 스위스 최대 은행 UBS 등은 탈세 혐의가 있는 미국인 고객 4450명의 예금 정보를 미 국세청(IRS)에 건넨 데 이어, 프랑스에도 3000여 명의 고객 정보를 줬다. 당초 UBS와 스위스 정부는 수세기 동안 유지한 스위스의 ‘은행 비밀보호법’을 위반하는 것이라며 정보 공개를 거부했다. 그러나 지난해 세계 금융위기 이후 미국·프랑스·독일 등이 조세 피난처를 탈세의 온상으로 지목하며 탈세 정보를 공개하지 않으면 금융거래를 제한하겠다고 위협하자 굴복했다.

그 결과 스위스 금고에 돈을 넣은 미국 부자들은 징역형을 피하기 위해 잇따라 탈세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정재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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