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502.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제11장 조우

사람을 설복시키려면 내키지 않더라도 대범하고 원만한 심보를 가져야 하겠는데, 손씨의 말에는 가시가 돋아 있었다.

천지개벽이 된다 하여도 박봉환이가 장관 자리를 넘볼 수 없다는 말이 바로 그랬다.

물론 박봉환은 그 말이 백번 옳은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번 쓰고 버릴 것이라 해서 언행이 그래선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에 없는 말이라도 자네라고 장관 자리 돌아오면 감당을 못할까 했어야 설득하려는 사람의 올곧은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손씨의 언동은, 손으로는 배 문질러 주면서 신발로는 발등 밟는 격이었다.

따라서 박봉환의 대꾸도 곱상스러울 리 없었다.

"마누라가 홰를 치고 설쳐대면 집구석 망한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네요?" "에끼 이 사람. 그걸 대꾸라고 하나? 그럼 뭣 때문이었다고 생각했나?" "형님이 사내 구실을 못해 처형이 히스테리 부린 거로만 알고 있었다카이요. " "이 사람 큰일 낼 사람일세? 내가 사내 구실 못한다고 떠들고 다니는 놈이 도대체 누구여?"

"누구랄 것도 없어요. 어제 처형이 북새통을 친 것이 바로 그것 때문이 아입니꺼?" "동기간끼리 끝내 험악하게 나올 거야 정말?" 더 이상 입씨름을 벌였다간 손찌검이 벌어질 것 같아서 참긴 하였으나,가슴 속은 개운치 않았다.

그래서 서울에 도착할 동안 두 사람 사이는 찜찜한 그대로였다.

첫 거래였기 때문에 지불은 현찰만 가능했다.

욕심껏 물건을 구입하긴 하였으나 부피로나, 무게로나 인천항 세관 검색대를 무사히 통과할 가망은 없었다.

분수 이상의 화물을 만든 것은 사전에 조여사의 사주가 있었지만, 결국은 조여사를 직접 만나야 안심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과 한 상자를 사들고 천호동에 살고 있다는 조여사의 집을 찾아 나섰다.

조여사는 짐작했던 것과는 달리 스무평도 안되는 협소한 아파트에 홀로 살고 있었다.

보따리들 사이에서는 인천세관을 한 손에 넣고 휘두르는 거물로 소문나 있었으나 살고 있는 방안에는 기생방처럼 변변한 가재도구 한가지 갖춰진 것이 없었다.

안방에는 중국에서 사왔다는 대형 살부채 하나가 방의 주인이 자기인 것처럼 벽 한 면을 온통 차지한 채 걸려 있었다.

장식이라곤 오직 그 한 가지뿐이었다.

엊그제 수해를 당한 집처럼 옷장도 없었고, 이불장도 보이지 않았다.

방바닥에 놓인 것도 때가 꼬질꼬질하게 묻은 전화기 한 대와 패를 떼다 만 화투 한 몫이 전부였다.

출세한 아들.딸들이 많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홀로 살고 있는 살림살이가 그토록 검소했다.

좁은 방에 세 사람이 들어앉고 보니 땀 냄새와 발 고린내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조여사는 두 사람이 들고 온 과일상자에는 눈길 한번 주는 법이 없이 부채질만 하고 있다가 불쑥 한마디 던졌다.

"우리 셋이서 고스톱 칠까?" "요 앞에 나가서 마실 거라도 사올까요?" "마셔 봤자, 그때뿐이지. 이열치열이라고 고스톱에 빠지면 이깐 더위쯤은 금세 잊어요" 조여사는 화투판을 싫어하는 박봉환에게 두어번 부채질을 해주었다.

구미가 당긴 손씨가 봉환의 어깨를 툭 쳤다.

조여사를 구슬리자면 고스톱 판에서 상당한 금액을 잃어줘야 할 것 같았다.

분위기가 판을 벌이는 쪽으로 기울고 있는 눈치이자, 조여사는 부엌 싱크대를 뒤져 과일 쟁반을 들고 들어 왔다.

껍질이 쪼글쪼글 시들어가는 복숭아 두 개였다.

손씨는 벌써 화투패를 간추리고 있었다.

얼떨결에 판을 벌이기는 하였으나. 얼마를 잃어줄 것인지 사전 약조가 없었기 때문에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세 판을 치고 나서 박봉환은 손씨의 옆구리를 툭 치면서 조여사에겐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러나 조여사 먼저 눈치를 알아채고 면박을 주었다.

"화장실이 좁아서 두 사람이 같이 들어서기는 어림도 없어. "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