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다시보기] 장진의 '허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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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즐기는 모닝커피 한잔이 삶에 더할 나위 없는 여유를 만들어주는 일상의 연속. 그런데 이 천국 같은 생활이 실은 자유의지가 아닌 누군가의 조작에 의해 돌아가는 것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 안주하고 현실과 타협할 것인가. 아니면 갇힌 존재를 깨닫고 억압과 통제를 깨기 위해 노력할 것인가.

지난 7일 대학로 학전그린 소극장에서 막이 오른 장진 작.연출의 '허탕' 은 바로 이런 물음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주제는 무겁지만 이를 표출하는 방식은 관객에게 친절한 감각파 연출가로 알려진 장진답게 유쾌하다. 여백 없이 배우들의 치고 받는 대화로만 진행되는 철저한 언어연극이면서도 재치있는 대사와 관객의 눈까지 배려한 깔끔한 무대장치 덕분에 관객들은 주제에 짓눌리지 않고 즐겁게 작품에 몰입할 수 있다.

장진은 우리의 현실을 감옥으로 풍자한다. 침대와 소파까지 갖춘 안락한 공간이지만, 두꺼운 철문과 쇠창살이 바깥 출입을 막는 분명한 감옥이다.

여기에는 이미 이곳 생활에 길들여진 장덕배 (정규수.정지현 더블캐스팅) 와 새로 들어온 유달수 (임원희.신하균)가 점차 적응하며 지낸다.

여기서의 적응은 자신의 존재를 잊는 것이다. 원두커피에다 듣고 싶은 음악이 무진장 쌓여있는 CD랙. "무슨 이런 감옥이 있느냐" 며 혼란스러워하던 달수도 덕배에게 담배를 요구할 만큼 죄수라는 존재를 잊는다.

감시카메라는 그들을 통제한다기보다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들어주는 고마운 기구, 쇠창살은 지옥 같은 바깥세상의 이물질이 천국같은 이 감옥에 들어오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로 그 의미가 변질된다.

이렇게 안락한 죄수생활에 안주하는 이들이 감시카메라 앞에서 당당히 쇠창살을 쇠톱으로 깎아내고 감시카메라가 잡지 못하도록 숨어서 담배를 피운다.

이 행위는 자신들의 존재를 잊지 않으려는, 아니 형량도 없는 수감생활로부터 석방을 꾀하는 소박한 노력이다.

때로는 타협하며 때로는 투쟁하는 와중에 평온한 감옥의 일상을 붕괴시키는 사건이 일어난다.

눈을 가리고 왔던 덕배나 달수와는 달리 눈가리개 없이, 즉 이곳의 위치를 알고 있는 임신한 여죄수 서화이 (김성미.구혜진) 의 등장이다.

하지만 화이는 기억상실증에 걸린채 달수와 사랑에 빠진다. 화이의 기억복원은 탈출을 위한 필수조건이지만 나가야할 필요성을 잃어버린 달수는 기억을 살리는 것을 두려워한다.

시종일관 긴장감과 재미 속에 주제의식을 잃지 않고 진행되던 극은 화이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는 순간 맥이 풀린다. 통렬한 풍자가 상투성에 희생되기 때문이다. 10월31일까지. 02 - 763 - 8233.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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