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칼럼] 노이로제 걸린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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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조폐공사 파업유도사건에서 한가지 재미있는 (?) 일이 있었는데 별로 사회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그냥 넘어갔다.

진형구 (秦炯九) 전 대검공안부장이 검찰수사에 대비해 강희복 (姜熙復) 전 조폐공사사장에게 휴대폰을 하나 보냈다는 것이다.

일반전화로는 감청될지 모르니까 안심하고 말을 맞추기 위해 휴대폰을 보내줬다는 것이다.

대검공안부장이라면 감청문제 같은 것을 다루는 최고위직의 하나다.

이런 사람까지 마음놓고 전화를 못한다니 이건 무슨 얘기인가.

지난해 국정감사때 수사기관의 감청.도청이 크게 문제되고, 당시 정부는 관계장관 연명 (連名) 으로 '전화 마음놓고 쓰세요' 라는 큼직한 신문광고까지 낸 것으로 기억된다.

그후 정말 도청이 중단됐는지, 그대로 계속되고 있는지는 필자로선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실제 도청이 있건 없건 많은 사람이 도청이 광범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확실히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얼마전 저녁을 먹은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 한 사람이 "쉿, 이 집에서는 그런 얘기 하지 맙시다. 여기도 도청될지 몰라" 하는 것이었다.

"아니 음식점에도 도청장치를 한단 말이오" 하고 물었더니 정.관계 인사들의 출입이 잦은 몇몇 이름있는 음식점에서는 도청이 된다는 얘기가 파다하다고 했다.

솔직히 말해 중앙일보의 기자들도 중요한 얘기는 전화로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도청당한다고 의심하는 것이다.

중요한 얘기는 자기 전화가 아닌 다른 전화로 하는 간부도 있다.

웬만한 기업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어떤 기업에서는 도청감지기를 설치하고, 보안회사를 시켜 자기네 사무실에 도청장치가 없는지 점검도 한다고 한다.

웃기는 것은 집권측의 인사들도 도청노이로제는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정부의 힘깨나 쓰는 기관의 책임자가 저녁약속을 한 어떤 음식점에 웬 사람들이 미리와 샅샅이 훑어보고 갔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도청장치가 혹 없는지 미리 점검한 것이다.

보안에 민감한 유력한 정부기관 책임자가 실은 자기 전화까지도 틀림없이 안전하다고 확신하진 못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우리 사회의 도청공포증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만하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정치권에선 휴대폰을 몇개씩 갖고 쓰는 사람이 많다.

야당의 어떤 의원은 다른 사람 이름으로 된 휴대폰을 열개쯤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도청뿐 아니라 계좌추적 노이로제도 심각한 모양이다.

어떤 여당의원은 어느 날 거래하는 은행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의원님 계좌를 누가 보고 갔습니다" 하는 얘기였다. 아무 사건과도 관련이 없었던 그 의원이 나중에 알아낸 것은 다른 정치인 관련 수표를 추적하던 어느 곳 사람들이 한번 훑고 지나갔다는 것이었다.

얼마전 신문에는 내각제 유보에 비판적인 충청권 어떤 의원이 몇개월간 계좌추적을 당한 것으로 보도됐다.

세풍자금과 관련된 야당의원은 말할 것도 없고 무슨 사건 무슨 리스트니 하여 알게 모르게 계좌추적을 당한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유언비어도 보통이 아닌 것 같다.

저명인사 모 (某) 씨에겐 숨겨둔 여자가 있다더라 하는 건 흔한 얘기다.

최근 언론계 일부 인사의 재산문제가 폭로된 후 "다음 차례는 누구다" "언론계의 아무개가 누구로부터 얼마를 받았다더라" 는 따위의 음해성 (陰害性) 얘기가 심심찮게 돌아다닌다.

증권가 소식지에는 하루에도 몇십건씩의 유언비어가 소개된다.

도청.계좌추적.유언비어, 이런 현상이 뭘 의미하는가.

마음놓고 전화도 못하고 자기 재산이 누군가에 의해 감시당하고, 영문도 모를 헛소문에 시달리는 사회라면 정상사회라고 하기 어렵다.

서로가 서로를 못믿게 되고, 언제 무슨 일로 약점을 잡힐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감도는 사회라면 거기에 무슨 안정감이 있고 신뢰가 있을 수 있는가.

이런 현상은 정상적인 민주국가로서는 설명하기 힘든 일이다.

물론 당국은 공식으로는 부인할 것이다.

불법적인 감청은 없다, 계좌추적은 법원 허가를 받아 하는 것이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유언비어에 대해서도 출처가 잡히면 엄단할 방침이라고 말할 게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공식입장과는 따로 도청과 계좌추적에 대한 광범한 불안감.불신감이 존재하고 유언비어가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일들이 정부를 불신하게 만들고 정권 이미지를 손상할 것은 불문가지 (不問可知) 다.

외국 언론은 흔히 DJ를 '민주화의 영웅' 이라고 부르는데 '영웅' 답게 이런 문제를 쾌도난마 식으로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일까.

송진혁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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