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런왕'라이언 킹'] 5. 이승엽 타자변신 첫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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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싫습니다. " 투수를 포기하고 타자로 전향하라는 우용득 감독과 박승호 타격코치의 권유에 이승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왼손투수로 LG를 꺾어보겠다고 말한지 한달도 되지 않았는데 타자를 하라니 어이가 없었다. 타격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발이 느렸다.

뛸 수 있는 수비 위치가 1루수 정도. 그러나 당시 삼성에는 양준혁 (해태).김성래 (쌍방울).이만수 (은퇴)가 번갈아가면서 1루를 맡고 있었다. 그 대선배들을 제치고 1루를 차지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지 말고 한번 해보자. " 박승호 타격코치도 끈질겼다. 고교시절부터 이를 눈여겨본 박코치는 한달동안 따라다니며 타자 전업을 권했다. 이도 흔들렸다.

"지금은 팔꿈치도 아프니 어차피 투수훈련이 힘들다. 해보다 안되면 다시 투수를 해도 좋다" 는 권유가 달콤하게 들렸다.결국 이는 "전반기까지만입니다.

후반기부터는 다시 투수를 하겠습니다" 라고 약속한 뒤 '시한부 타자전업' 을 받아들였다.

처음 잡아보는 나무 방망이. 고교때까지 알루미늄 방망이로만 타격을 해왔던 이에게 나무 방망이는 낯설었다.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2월 어느날. 이는 T배팅을 시작했다.

"딱" 하는 파열음과 함께 손에 느껴지는 기분좋은 감각. 잠재해 있던 '끼' 가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일까. 이는 "걱정과 달리 기분이 좋았다. 타구가 알루미늄보다 더 멀리 나가는 느낌이었다. 이상한 날이었다" 고 회상한다.

그 '이상한 날' 은 바로 국내 프로야구의 역사를 바꾸는 거인의 걸음마가 시작된 날이었다.

이태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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