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국가보안법 '폐지'보다 '개정'이 먼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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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회가 어제 국가보안법(국보법) 폐지를 법무부 장관과 국회의장에게 권고했다. 이미 우리 사회는 이 법의 유지 및 개폐를 놓고 극심한 대립양상을 보이고 있다. 보수와 진보 단체는 각각 '무장해제'니 '통일에 진일보'니 하면서 목청을 높이고 있다. 어쩌면 이 법을 놓고 우리 사회가 갈등의 소용돌이에 휩쓸릴 소지도 있고, 사회 세력 간에 긴장도 높아질 위험이 크다.

우리는 확대된 남북교류나 우리 사회의 시대 흐름에 비추어 볼 때 국보법은 고칠 때가 왔다고 본다. 법은 시대의 현실과 환경에 맞게 변화돼야 한다. 사회변화를 반영하지 못하는 법은 이름만의 법으로 남게 되고, 변화를 반영한 법만이 법으로서 생명력을 지닌다. 국보법은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위협을 방어하는 데 그 존립근거가 있었고, 분단과 북한의 위협 속에서 나름의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탈냉전화에 따라 한반도 안팎의 환경도 변화되어 왔다. 현 남북관계는 국보법이 마지막으로 개정된 1997년보다 훨씬 진전됐다. 개성공단. 철도연결 등은 당시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특히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은 국보법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특히 국보법 일부 조항은 악용 소지가 있어 개정의 필요성은 현실적이다. 찬양고무죄를 규정한 제7조를 비롯해 상당수 조항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동안 7조를 고쳐 1항에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라는 식의 문구를 넣어 애매함을 보완하기는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의 법이 될 소지는 남아 있다. 실제로 "주한미군 때문에 통일이 안 된다"고 무심결에 말하거나,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갖고 있어도 현 국보법으로는 처벌받을 수 있다. 이런 조항들은 당연히 고쳐져야 한다.

이런저런 문제가 나왔으니 아예 국보법을 폐지하자는 주장도 강력하다. 인권위의 건의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법의 폐지는 아직은 이르다고 본다. 남북 간 교류협력은 강화됐어도 정치군사적 대치상황마저 완화되진 않고 있다. 지금도 휴전선엔 중무장한 100여만명의 양측 군인이 포진하고 있다. 남측을 해방하겠다는 노동당 규약과 남한을 '원수의 나라'고 규정한 형법도 그대로 있다. 북한이 아직까지 '안보위협세력'인 점은 분명하고 남쪽에 충분한 신뢰를 주지 못하고 있다. 지속되는 남북 대치상황에서 이런 측면에 눈을 감을 수는 없다. 이런 점에서 국보법은 일차적으로 인권침해의 소지가 있거나, 사문화된 조항들을 폐기.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폐지 문제는 향후 남북관계가 보다 화해협력으로 갈 때 단계적으로 고려할 문제다.

개정과 관련, 우선 불고지죄는 폐지돼야 한다. 또 찬양고무 조항을 '공개적 장소에서 조직적으로 할 경우'에 처벌한다는 등 보다 명백하게 해야 한다. 북한을 사실상 반국가단체로 규정한 '정부 참칭' 조항도 삭제하는 것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남북이 유엔 회원국인데다 정상회담까지 한 우리의 통일정책 실체와 상충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현 조항에 있는 '국가의 변란'을 그대로 두고 그 내용을 엄격하게 규정하면 된다.

국보법은 그야말로 신중하게 단계적으로 남북 신뢰지수에 따른 상호주의에 입각해 다뤄야 한다. 이 논의에 독선이 들어가면 심각한 국론분열을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국보법 개폐 논의는 한쪽 눈이 아닌 복안(複眼)으로 우리가 처한 현실을 냉정히 직시하면서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여권은 과반수 의석을 확보했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추진해선 안 된다. 안보 불안을 느끼는 상당수 국민도 우리 국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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