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어디서 무엇이 되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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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부처가 6년 동안의 고행끝에 보리수 아래서 처음 깨달은 것은 연기 (緣起) 였다.

'말미암아서 (緣) 일어난다 (起)' 는, 곧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관된 관계에서 존재한다는 뜻이다. 조건 없이 존재하는 것,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으며 절대적인 것, 영원한 것, 무조건적인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이 '연기의 이론' 이 바로 불교의 근본사상이다.

아닌게아니라 우리네 삶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온갖 형태의 인연으로 얽혀져 있다. 그 인연은 아름다운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악한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작고한 이산 (怡山) 김광섭 (金珖燮) 시인은 '저녁에' 라는 작품에서 인간사에 있어서의 인연을 이렇게 읊는다.

"…밤이 깊을수록/별은 밝음속에 사라지고/나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이렇게 정다운/너 하나 나 하나는/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일찍이 미국으로 건너간 수화 (樹話) 김환기 (金煥起) 화백은 이 시의 마지막 두 줄을 화제 (畵題) 로 하여 명작을 그렸고, 이 작품은 지난 70년 제1회 '한국미술대전' 에서 대상 (大賞) 을 받았다.

이 작품은 이민생활의 고독 속에서 그리운 한 사람 한 사람이 생각날 때마다 하나씩 찍어나간 점 (點) 들의 모임으로 구성돼 있다.

이산의 시에서나, 수화의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 (輪廻) 의 사상이요, 인과 (因果) 혹은 연의 철학이다. 하지만 이들 작품이 각별한 감동을 주는 것은 '아름다운 인연' 들이 소재로 돼 있기 때문이다.

만약 악연을 소재로 했다면 그만한 감동을 주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악연들은 돋보이게 마련이다.

특히 권력의 부침 (浮沈) 이 무상하면 입장이 서로 바뀌는 경우도 적잖이 생긴다. 착하지 못하고, 정직하지 못하며, 성실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탓이다. 흠 잡힐 일이 없으면 우리네 인간사에 악연이란 있을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사람들은 모르는 채 살아간다.

이러저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무수히 봐온 터이지만 이번 '파업유도' 사건에서도 전직 장관과 검찰 간부가 후배검사들에게 조사를 받는가 하면, '경기은행' 사건에서는 대학시절 막역한 친구 사이였던 인천시장과 지검장이 피의자와 조사관의 신분으로 마주앉게 된다고 한다.

세상만사는 '말미암아서 생긴다' 는 연기의 원리를 일찌감치 깨우쳤던들 이런 악연은 없었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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