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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의 희망찾기] 11. 오늘은 다르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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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긴세월동안 '얼굴 없는 시인' 으로 떠돌다 돌아와서일까, 얼굴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91년 체포될 때의 이글거리던 반역의 눈빛, 성난 호랑이처럼 포효하던 혁명가의 얼굴은 어디로 갔느냐. 마치 세속을 떠난 수도자처럼 평온해 보인다.

어쩌면 그렇게 얼굴이 변할 수 있느냐" 고 묻는다.

정말 내 얼굴이 변하고 내가 변한 것일까. 일부 공안검사들은 "한번 빨갱이는 영원한 빨갱이야. 간질병자가 늘 간질하나, 결정적일 때 발작하니까 위험한 거지" 하면서 두고 보자고 벼른다.

또 한쪽에서는 "박노해가 변절한 거 아니냐. 완전히 맛이 갔다더라" 고 수군거린다.

그러나 사람은 변화하면서 성숙하는 존재가 아닌가.

변화와 변절은 다른 것이다.

맛이 가더라도 썩어 변질된 맛과 잘 익어 승화된 맛은 전혀 다르다.

내가 변하지 않았다고 보는 눈과, 내 변화를 부정적으로만 보는 눈. 이들은 사람과 세상을 진화.발전하는 과정으로 보지 않고 완결된 고정체로 본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다.

자기 관점 이외에는 모두 틀렸다고 보는 절대 유일의 잣대만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서로 통한다.

그럼에도 나는 그렇게 판단하는 눈들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한다.

우리 근.현대사는 인물들을 그냥 두지 않았다.

많은 인물들이 죽임을 당하고서야 영웅으로 치켜세워졌다.

외세와 군사독재의 총칼 앞에 몸을 던졌던 순결한 인물들이 하루아침에 변절하고마는 뼈아픈 역사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집단 속에 몸을 맞추거나 중간만 가는 게 안전하다고 믿는 관성이 생겨났다.

변화를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변치 않는 지조만이 미덕인 양 받들기도 한다.

이런 현실에서 변화란 흔히 '외눈 이동' 현상으로 나타난다.

한쪽 눈만 가지고 세상을 보다가, 반대편 현실에 눈이 열리는 순간 또다른 극단으로 '외눈 이동' 해버리는 것이다.

사람이 두 눈을 가진 것은 좌도 보고 우도 보자고, 앞을 보면서 뒤도 돌아보자고, 바깥도 보고 자기 안쪽도 들여다보자고 하는 뜻이 아닌가.

그런데도 한쪽 눈만 가지고 세상을 다 아는 듯이 소리치며 대립해온 역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기에 변화의 격랑에 몸을 던져 새로운 진보의 지평에 도달하려는 시도는 낯설고 불온해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진보의 본성은 '변화' 다.

세상 만물은 시간의 흐름 속에 존재한다는 것,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것, 이 단순한 진리가 나에게는 얼마나 눈물겨운 희망이었던지. 70년대였다.

박정희 유신독재 아래 암담하기만 하던 공장 생활, 전쟁 같은 노동에서 풀려난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나는 갑자기 찾아온 황홀한 여가를 어찌할 줄 모르고 거리에 나섰다.

대낮의 햇살 가득한 거리를 눈을 가늘게 뜨고 마냥 걸었다.

나도 모르게 발길이 청계천 중고 책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먼지 쌓인 헌책더미를 뒤지던 내 눈에 시퍼런 인광처럼 빛나는 문장 하나! '나날이 새롭게' 라는 제목이었다.

나는 그 책을 펼쳐들고 빨려들듯 읽어나갔다.

"세상은 변화한다. 모든 것은 날로 새로워진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진실은 반드시 드러나고 정의는 마침내 승리한다.

절망하고 또 절망하면서도 우리는 스스로 거듭 태어나 그 변화의 시간을 앞당기자" 던 푸른 말씀들은 얼마나 경이로운 발견이었던가.

그렇다.

변화는 언제나 힘없고 고통에 찬 사람들의 희망이다.

현실에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은 변화를 두려워한다.

그들은 변화를 부정하고 막으려든다.

그러나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은 변화 속에서 희망을 찾고 변화의 시간을 앞당기기 위해 몸부림쳐 왔다.

그런데 요즘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정말 어리둥절하다.

보수세력이 오히려 변화에 앞장서고 있는 것이다.

세계화.정보화, 효율성과 구조조정을 내세우며 변화를 주도함으로써 기득권을 미래로 가져가려는 것이다.

반면에 실직의 불안과 막막한 미래 앞에 떨고 있는 노동자와 서민들은 변화가 두렵고 괴로울 뿐이다.

약자들의 희망이던 변화가 강자의 무기가 되고마는 이 무서운 현실. 21세기를 맞이하는 세계사적 변화의 충격 앞에서, 보수와 진보가 선명하게 나뉘던 지금까지의 구도가 해체되고 있는 현실을 나는 소스라치며 직시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문제는 변화다.

돌아보면 언제나 바깥 세계의 변화 속도는 우리 내부의 개혁 속도보다 훨씬 빨랐고 그 '변화의 시간 차이' 만큼 혹독한 고통을 불러오곤 했다.

이 세계사적 변화는 그것을 무시하고 부정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변화는 그에 따르는 고통만큼이나 크나큰 진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변화의 속도에 '느림' 이나 '지조' 로 대항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빠름' 은 '열린 깊이' 로 휘어잡아야만 그 방향을 바로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내 얼굴이 변했다고들 한다.

그러나 나는 원래의 내 얼굴로 돌아왔을 뿐이다.

오늘의 내 얼굴을 되찾기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고 살을 에는 폭풍우 속을 헤쳐왔던가.

엄혹한 독재정권 시절, 그 '짐승의 시간' 을 '인간의 시간' 으로 되살리기 위해 우리는 성난 얼굴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결국 무덤 속 같은 독방 벽 속에 갇혀 뼈아픈 패배에 절망하며 침묵과 성찰의 시간을 살아내야 했다.

그리하여 나는 변해서는 안될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도 적극적으로 자기 변화를 이루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변화 빠른 시대에는 스스로 변화하는 가치와 전통만이 살아 계승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재창조를 향한 자기부정과 새로운 길찾기에 몰두하면서 나는 엄습하는 두려움과 인간적 유혹에 시달려야 했다.

남북 분단과 양극 대립의 첨예한 현실에서 변화를 말하고 실천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태로운 일인가.

극우와 극좌 양쪽에서 날아오는 돌팔매에 몸을 드러내놓기보다 과거 이름의 영예를 지키며 조심조심 가는 길이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보았다.

감옥 혼거 (混居) 방 한쪽에서 갓 스물된 '새끼 건달' 들이 먹바늘로 살을 찔러 문신을 새기고 있었다.

또 한쪽에서는 서른살쯤 된 중간 보스들이 벌겋게 생살을 벗기며 문신을 지우고 있었다.

수십년간 반복돼온 서글픈 풍경이었다.

왜 문신을 지우는 선배들이 철없이 문신을 새기는 후배들에게 자신의 변화된 생각을 책임있게 말해주지 못하는 걸까. '지조' 와 '변절' 의 양극단 사이에서 '바른 변화' 의 길을 창조적으로 열어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울면서라도 앞서 가야 할 길이 아닌가.

내가 먼저 변화하지 않고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아직 근본적으로 변한 것 없는 현실, 그러나 과거의 문제들조차 미래의 관점, 미래의 방식으로 풀어야 바르게 풀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제 운동 그만두고 정치하려는 거 아니냐" 고 물어온다.

하지만 나는 이제야말로 운동을 하겠다고 다짐한다.

지금은 '시장권력' '정치권력' '시민사회' 가 3각 정립되고 있는 시대이기에 운동은 더욱 더 중요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운동은 사랑의 사회적 확장이다.

'좋은 사람' 의 숲을 이뤄 '아름다운 싸움' 으로 세상을 살 만하게 바꿔 가는 사랑의 최고 형태가 운동이 아닌가.

운동이 뿌리와 줄기라면 정치는 꽃이라 할 수 있다.

지난 30년의 민주화 운동은 정권교체라는 꽃으로 피어났다.

이제 변화된 현실에서 새로운 뿌리를 키우는 철학과 운동이 있어야만 새로운 정치도 꽃 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새 길은 멀고 앞은 험하다.

나는 감옥 문을 나서며 세가지 운동 원칙을 세워 보았다.

하나는 더 이상 지는 싸움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한꺼번에 성취하기보다 착실하게 역량을 축적하는 운동, 비록 실패하더라도 그 의미를 분명히 현실에 새기는 운동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돈이 되는 운동을 하겠다는 것이다.

'돈은 명령이다' 고 하지 않는가.

착하고 의로운 사람들이 내는 회비는 바른 운동을 하라는 명령이 된다.

사람을 감동시키고 비전을 주고 사는 데 도움이 되는 운동에는 사람과 회비가 모일 수밖에 없다.

벌여만 놓고 뒷감당을 못하는 식이 아니라 끝까지 책임지는 운동이라면 경영하는 능력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또한 즐거운 운동을 하겠다는 것이다.

지나친 사명감으로 찡그리며 하는 운동은 반드시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경험했다.

무겁고 힘든 일도 함께 잘 나누면 가벼워지지 않는가.

영혼이 맑고 건강한 사람들이 좋은 뜻을 모아 서로 연대하면서, 보람과 재미를 나누는 운동이라면 어찌 사람들이 참여하지 않겠는가.

새 천년을 앞둔 거대한 변화 속에서 새 길을 찾아 나서는 한 걸음 한 걸음. 양극을 품은 긴장된 떨림이고 다시 새벽에 길 떠나는 첫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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