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밭 '제3의길'…英노동당 의원 44명 '틀린 길'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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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제3의 길' 을 달리는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자동차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지금까지 몇차례 제동이 걸리긴 했지만 이번엔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것이다.

영국 노동당 의원 44명은 2일자 영국 트리뷴지에 블레어 총리에게 정면도전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제3의 길은 잘못된 길이며 사회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노동당의 전통적 가치로 돌아올 것" 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성명에는 현직 각료인 피터 헤인 웨일스장관 외에 신노동당 정책 지지자인 클레어 와드.마리아 이글 의원, 우파성향이 강한 그위니스 던우디.스튜어트 벨 의원 등 노동당내 각 정파들이 망라돼 있다.

이들은 "블레어 총리가 영국 사회를 왜곡시키고 있는 빈곤과 총체적 불평등을 시정하는 노동당 의무를 저버리고 있다" 고 비난했다.

이와 함께 노동당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자유민주당과의 중도좌파 연합노선마저 버릴 것을 요구했다.

의원들은 여세를 몰아 17일 열릴 예정인 '노동당 지키기' 런던대회에서 이 사안을 강력 제기할 방침이다.

노동당 소속 의원은 모두 4백18명으로 반 (反) 블레어 그룹이 아직은 당내 소수이긴 하나 1백여명이 동조하는 등 상황은 계속 악화되고 있다.

블레어 총리는 그동안 야당인 보수당으로부터 숱한 비난에 시달려왔다.

윌리엄 헤이그 보수당 당수는 "노동당 정부의 교육.보건.복지정책이 모두 영국만의 특성을 파괴하는 데 기여했다" 며 블레어 총리의 중도좌파 노선을 혹평했다.

"블레어 총리가 영국의 가슴에 비수를 들이대고 있다" 는 극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노동당내의 비판도 있었던 게 사실이다.

원내총무를 지낸 데렉 포스터 의원은 "블레어 총리가 노동당의 전통적 좌파철학을 훼손시키는 '정치적 매춘' 을 자행하고 있다" 는 독설까지 퍼부었다.

그러나 내부비판이 집단반란으로까지 이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여기에는 지난달 유럽의회 선거에서의 패배가 주요 계기가 됐다.

노동당내 비판자들은 "노동자에서 중산층을 대표하는 당으로 간판을 바꿔달려는 시도는 대가를 지불하게 될 것" 이라고 제3의 길을 경고해왔다.

그러던 차에 유럽의회 선거에서 노동당이 의석의 절반 이상을 상실하는 참패를 당하자 "그것 보라" 며 비아냥거렸다.

외부 장애물이 아닌 자동차 내부의 고장으로 블레어 총리로서는 집권 1년7개월만에 최대의 정치적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이훈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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