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당돌한 짱구, 어른들도 웃고 울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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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호 05면

2006년 11월 3일 일본 도쿄에서 국내 출판계 인사들과 자리를 함께 한 우스이 요시토의 생전 모습. 만화 전문 출판사인 거북이북스의 강인선 대표가 중앙SUNDAY 매거진에 보내왔다.

크레용신짱(クレヨンしんちゃん). 우리에게는 ‘짱구는 못말려’로 더 친숙한 만화. 가장 만화다운, 재미와 웃음과 때론 찡한 감동을 줬던 만화.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았지만 그만큼 많은 오해도 받았던 만화. 어른들을 위한 만화로 시작해 가족 만화로 발전한 특이한 성장 스토리를 지닌 만화. 1990년 8월 연재를 시작해 2009년까지, 19년 동안 연재된 만화. 일본에서만 총 6500만 부가 팔린 만화. 애니메이션으로, 캐릭터 상품으로, 심지어 만화에서 신짱이 먹던 육각형 상자에 담긴 과자(초코비)가 실제로 상품화되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한 만화. 사랑스러운 말썽꾸러기 신짱, 아니 짱구. 하지만 이제 우리는 짱구를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됐다.

OBITUARY- ‘짱구는 못말려’의 우스이 요시토

‘크레용신짱’의 작가 우스이 요시토(臼井儀人·51)가 20일 아라후네산의 절벽 아래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11일 등산하러 나간 뒤 돌아오지 않는다고 가족들이 실종신고를 낸 지 8일 만이다.

때마침 일본 극장에서는 ‘크레용신짱 극장판’인 ‘크레용신짱 폭풍을 부르는 앗파레! 전국대합전(クレヨンしんちゃん 嵐を呼ぶアッパレ! )’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 ‘발라드 이름없는 사랑의 노래(BALLAD 名もなきのうた)’가 인기리에 상영되고 있었다. 구사나기 쓰요시(초난강)의 복귀작으로 주목받은 영화로, 불가능할 것 같았던 개그만화 ‘크레용신짱’의 실사 버전이었다. 생각해 보라. 짱구가 몇 개의 단순한 선이 아니라 살아있는 아이로 스크린에 나온 것이다. 만화체로 그려진 코믹 만화가 극장판, 그것도 코미디가 아닌 장르의 영화로 제작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쾌거였다.

‘크레용신짱’은 기본적으로 개성 넘치는 인물들의 힘으로 웃음을 끌어내는 4쪽짜리 코믹 만화지만, 때로는 잘 짜인 서사 장치를 동원해 수십 쪽의 이야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우스이 요시토는 야구로 비유하자면 선발도, 세이브도 가능한 완벽한 투수였다. 그런 그가 죽었다.

1958년 시즈오카현에서 태어난 그는 77년 사이타마의 가스카데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디자인 학교를 다니다 중퇴하고 79년부터 한 광고회사에서 아르바이트 일을 시작했다. 그의 만화인생은 87년부터다. 출판사 후타바사의 주간지 ‘만화 액션’에 4컷 만화를 응모했고 신인상을 받았다.

90년 8월 이 주간지에 연재를 시작한 ‘크레용신짱’은 당초 성인용 만화였다. 천진난만한 유치원 남자 아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어른들의 숨겨진 욕망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거침없이 여자의 치마를 들추거나, 길에서 만난 아가씨에게 데이트를 신청하거나, 사람들 앞에서 성기를 흔들거나 하는 따위의, 내가 결코 할 수 없는 일들을 신짱은 거침없이 실행했다. 어른들의 욕망과 순수한 유치원 어린이라는 부조화는 웃음을 끌어내는 훌륭한 장치였다. 어른들은 ‘크레용신짱’에 열광했고, 인기 만화가 됐다. 90년대 초반의 일이다. 게다가 초반부 어른용 만화에 나오는 신짱은 지금보다 더 건방졌고, 시니컬했으며, 성적 욕망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만화의 인기에 힘입어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졌다. 일본 기준 첫 방영은 92년 4월 13일. 매주 금요일 오후 7시30분에 아사히TV를 통해 방영됐다. 어른용이었던 원작의 표현이 순화되기는 했지만 큰 틀은 변하지 않았다. 결국 일본에서도, 우리나라에서도 ‘크레용신짱’은 어린이들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90년대 후반 이후 점점 가족 만화로 변해갔다. 신짱의 눈썹이 두터워지고, 눈이 커지고, 얼굴에 젖살이 올랐다. 그리고 여동생도 태어났다. 해바라기 유치원 친구들의 이야기가 더 늘어나고, 성적인 에피소드는 점차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크레용신짱’은 여느 어린이 만화와 달랐다. 독자들의 요구로 가족 만화가 되었지만, 그 안에는 어른들의 마음이 여러 겹으로 담겨 있었다. 남자 어른들의 성적 판타지를 버린 뒤, 작가는 삶의 페이소스를 담았다. 직장에서 큰소리를 못 치는 남자들이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커다란 토끼 인형에 ‘크로스핸드’를 날리는 여자들은 다른 어린이 만화에 나오지 않는 풍경이다. 그리고 성적 판타지를 대신 만족시켜주던 신짱은 어른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사랑스러운 캐릭터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가 남긴 마지막 원고는 ‘만화타운’ 12월호(11월 5일 발매)까지 실린다고 출판사 측은 밝혔다.

‘크레용신짱’이 ‘짱구는 못말려’라는 이름으로 한국에서 한창 인기를 얻기 시작한 90년대 후반, 한국을 찾은 작가의 친절함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신짱의 사랑스러움이 작가의 모습이라는 것을 쉽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웃음과 위로가 더 필요한 세상인데, 그의 죽음이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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