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451.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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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제10장 대박 ⑦

긁히고 헤진 자국이 오히려 무늬 가진 여행가방 하나 달랑 들고 포구와 정거장을 안간 데 없이 들쑤시고 다녔기에 부박한 삶이 줄곧 그녀를 붙잡고 있었을테고, 어딜 간들 거칠고 각박한 인심에 온몸으로 부대껴 왔으면서도 어떻게 저토록 해맑은 웃음과 땟국없는 면목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것이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강렬하게 이끌렸던 인상이었고, 또한 의문이기도 했었다.

거짓과 가식은 그녀가 가진 다양한 삶의 무늬에 켜켜이 쌓인 고뇌와 시달림에 대범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나름대로의 지혜를 터득했기 때문인지 몰랐다. 척박하고 부정한 삶에 끊임없이 부대끼고 갈등을 겪어왔으므로 과욕은 결국 자신을 괴롭히고 해칠 뿐이란 것을 알고 있었을 터였다.

그래서 휘황한 세상의 불빛 저편 그늘에 숨어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 행복은 아닐지라도 극악스런 불행을 자초하는 길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앞가림도 변변치 못했던 변창호라는 늙은이를 선택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랬기에 승희는 차마담을 부러워했었다. 선택은 한철규에게도 있었다.

승희가 그랬던 것처럼 역시 그녀의 신선한 가치가 돋보였기 때문에 수천만원의 손실을 감내하면서 두 사람의 결합을 지켜주기로 결심할 수 있었다. 돈이란 이럴 때 아낌없이 써야 한다는 생각까지 가지게 만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순진무후한 안색 뒤에 숨어 있는 비밀이나 음모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이제 그것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변씨를 애써 꼬드겨 고흥으로 내려보낸 배려조차 그녀는 안중에 없어보였다.

이제 울음을 그친 그녀를 오랫동안 노려보고 있었지만, 배신의 차일 뒤에 숨어 있는 그녀의 허위는 한가닥도 도려낼 수 없다는 것만 깨닫고 있었다. 눈은 마음의 거울이라 했었는데, 아직도 글썽이고 있는 그녀의 눈을 아무리 바라보아도 배신과 부정의 수수께끼는 풀 수 없었다.

이 순간, 긴장과 초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한철규 뿐이란 것만 알아냈을 뿐이었다. 한철규의 반응을 기다렸으나 침묵만 지키고 있었기에 그녀는 다시 말했다.

"어쨌든 미안해요. " "글쎄요. 미안하다는 한마디로 해결될 수 있다면 나도 얼마나 좋겠습니까. " "제가 변상할 거라도 있나요?" 그녀는 비로소 눈을 똑바로 뜨고 한철규를 쏘아 보았다.

그것이 차순진씨 본래의 얼굴이란 섬뜩한 발견이 가슴 한복판을 쓰리게 파고 들었다. 철규는 얼른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건너다니거나 떠도는 말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런데 돼지우리에 굴러다니는 오물처럼 흔한 말이 지금은 궁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 역시 그랬을 것이란 것은 그 자신이 내뱉은 한마디로 깨닫게 되었다.

"변상이라니요? 그 문제로 형님을 시골로 내려보내고 여기로 불러낸줄 아십니까?" "이제 와서 따진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만, 모든게…. 내 탓입니다. 변선생님 좋아했고, 그 분과 살림 들어간 것도 좋아했기 때문에 결심한 것이었고…, 능력없는 분이란 것도 진작 알고 있었고…. 주위에 계시는 분들이 가족 이상으로 변선생 받들어 모시는 것에도 감명을 받았지요. 그래서 언제 파투가 날지 모르겠지만, 변선생님 그늘에서 평범한 여자로 살기로 결심했던 것인데, 내 딴엔 신명을 바쳐 결심한 일이 일 같잖게 꼬이고 말았네요. 제 인생 꼬인 게 어디 이번 뿐이었나요. 걸핏하면 이러는 걸요. 첫 단추 한 번 잘못 꿴 것이 이처럼 지지리도 오랫동안 나를 괴롭히고들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많은 나이는 먹지 않았지만, 그 동안 꼬이기만 하는 팔자를 고쳐보려고 내 나름대로는 엎어져 보기도 했었고, 자빠져 보기도 했었는데…. 이제 또 어디로 떠나야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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