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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교전] 75년 일어난 상황과 닮은 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15일 남북 전투함정간에 벌어진 함포 사격전은 전쟁 일보직전까지 치달았던 75년 2월 상황과 흡사하다.

해군력이 열세였던 북한은 72년까지 북방한계선 (NLL) 을 준수해 왔으나 73년 체코제 스틱스 미사일을 탑재한 옛 소련의 유도탄정 (艇) 오사 코마를 도입한 뒤 수시로 NLL을 침범했다.

급기야 북한은 그해 12월 1일 군사정전위원회에서 "서해 5도가 북한군 통제하의 해역에 있기 때문에 5개섬 출입시 승인을 받아야 하며, 위반시 응당한 조치를 취할 것" 이라고 선언했다.

도발빈도를 올려가던 75년 2월 26일 기관총 등으로 무장한 북한 어선 10척이 NLL을 넘어오고, 긴급 출동한 우리 구축함 서울함.아산함 등이 무장어선 1척을 뱃머리로 들이받아 격침시키자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당시 아산함 함장이었던 해군대학 김일상 (金一相.65) 교수는 "북한측 무장어선임을 상부에 확인.보고하자 이를 나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며 "추격중 북한 어선의 좌측부위가 아산함 앞부분과 맞부딪쳐 결국 북한 선박은 침몰했다" 고 회고했다. 그러자 북한은 즉각 전면전 태세에 돌입했다.

코마 등 40척이 대오를 이뤄 전속력으로 남하했고 공중에서는 미그기들이 위협비행을 실시했다.

미그기는 위협사격을 가하는 등 34회에 걸쳐 NLL을 침범하며 무력시위를 벌였다.

그중 6대는 NLL남방 45마일까지 남하하기도 했다.

미군 팬텀기까지 출동하며 정면충돌로 치닫던 대치상황은 북한군이 사흘만에 물러나면서 유야무야됐다.

이 사건뒤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은 대대적으로 성금운동을 폈고, 한국형 고속정이 건조되면서 해군 함정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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