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결혼생활에 지친 남녀의 연쇄 불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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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등단 이후 『아름다운 여름』『여자의 계절』『현기증』『유리바다』 등 장편소설 쓰기에 주력해 온 소설가 고은주(37)씨가 첫번째 소설집 『칵테일 슈가』를 펴냈다.

표제작 ‘칵테일 슈가’를 포함해 소설집에 실린 여덟 편에서 고씨는 ‘과연 결혼은 당사자들의 권태와 외부의 유혹을 견딜 만큼 견고한 제도인가’라는 의문을 집중적으로 제기한다. 고씨의 판단은 부정적이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경쟁적으로 보일 만큼 서슴지 않고 불륜에 뛰어든다. 배우자의 불륜에 맞서서 바람 피우는 맞불 작전으로 나간다. 그럴 용기가 없는 축들은 한숨 짓거나 괴로워한다. 결혼생활은 견뎌 내야 하는 대상이다. 결혼 자체를 거부하기도 한다. 경제적·성적 필요가 충족된다면 굳이 결혼에 연연해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제도로서의 결혼’을 결딴 낸 성적 가벼움은 이미 광범위하게 퍼져서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여성들은 자진 매춘에 나선다.

사실 고씨의 소설이 드러내는 결혼제도의 문제들은 전혀 새롭지 않다. 소설이 현실에 대한, 그것도 엉성한 사후 보고서에 불과하다면 굳이 애써 읽어야 할 이유가 없다. ‘칵테일 슈가’는 그런 점에서 고씨의 고심이 묻어나는 작품이다. 커피에 녹여먹는 막대사탕을 매개로 등장인물들은 서로 복잡하게 얽힌 연쇄 불륜을 펼쳐 보인다.

어둠이 내려 앉은 야외 결혼식장. 나란히 주차장으로 미끄러져 들어온 두 대의 승용차에서 남녀가 각각 내린다. 매끈한 구두의 남자는 향수를 유난히 좋아하는 여자를 대학 시절부터 따라다녔지만 결국 헤어지고 만다. 여자의 경우 남편의 적극적인 외조를 받으며 커리어를 쌓고 싶어하는 타입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각자 가정을 갖고 있으면서도 지금 밀회 중이다. 여자는 “이거, 모양이 느낌표를 닮았지? 느낌표의 달콤함만 즐겨 봐. 심각한 물음표는 만들지 말고”라는 말과 함께 칵테일 슈가를 남자에게 건넨다.

남자의 아내 역시 남편 몰래 옛 남자를 만난다. 아내의 옛 남자는 인디고 넥타이를 즐겨 맨다. 인디고 넥타이는 연둣빛 스카프의 여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연둣빛 스카프는 유부남 소설가와 사귀는 중이고 소설가의 아내는 채팅에서 만난 닉네임 탈보를 대낮에 집안으로 끌어들인다. 칵테일 슈가는 불륜의 흐름에 따라 탈보의 손에까지 전해진 상태다. 탈보는 한편 와인바의 이혼녀 마담을 상대로 ‘작업’중이다. 정작 마담은 심약한 은행원과 은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탈보가 놓고 간 칵테일 슈가는 은행원이 챙기게 되는데, 은행원의 아내가 처음 등장했던 향수의 여인이다.
불륜의 연쇄가 계속되리라는 예감이 드는 순간 소설의 재미는 반감된다. 하지만 소설의 주인공들이 중간 중간 전하는 ‘결혼의 피로(疲勞)’는 곱씹어 볼만한 무게를 지니고 있다.

‘잠들고 싶다’의 주인공 ‘나’는 히포크라테스의 기질 분류에 따르면 ‘우울질’의 남자다. 나와는 정반대되는 ‘점액질’ 성격에 끌려 아내와 결혼했지만, 아내의 다른 점이 끊임없이 행복을 가져다주리라는 기대와 달리 아내와의 차이를 극복할 수 없어 절망 중이다.

‘떠오르는 섬’의 ‘나’는 모험적인 레포츠에 관심있는 점에 끌려 의사인 남편과 결혼했지만 결혼 자체가 모험이 되고 만다. 남편은 잡아놓은 물고기에 먹이를 주지 않는 속물일 뿐이다.
결혼 생활의 난점과 제도적 취약함은 역시 결혼한 입장에서 잘 들여다 보일 것이다. 방송국 아나운서 출신인 고씨는 소설을 쓰면서 아나운서 일을 접었지만 책 소개하는 TV 프로그램의 공동 MC로도 활동하고 있고 물론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있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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