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의 희망찾기] 6. 386세대에게 보내는 편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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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수민아. 다시 6월이구나. 신록이 짙어져 푸름의 절정으로 가는 6월은 너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별의 시간' 이 아니냐. 그 푸른 거리, 불의 거리, 눈물의 거리에서 우리는 만났지. 최루탄이 터지고 친구들이 죽고 피 흘리고 끌려가던 사나운 시대의 한복판에서 자신을 온전히 불태우던 젊은 별들, 슬프도록 맑았던 네 성난 눈동자가 지금도 눈 감으면 환하디 환해.

생각 나니? 6월의 밤거리에서 유인물을 뿌리다가 쫓겨 들어간 영등포시장 골목 주점에서 네가 소주잔을 들고 울면서 했던 이야기. 광주의 마지막 밤이었지. 공수부대는 도청으로 착착 조여오고 총소리가 나기 시작하면서 한 여자의 절박하고 떨리는 목소리가 확성기를 타고 울려나왔지.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 형제자매가 공수부대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시민 여러분, 부디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

그날 밤 광주 시민들은 아무도 잠들지 못했지. 부끄러움 때문에. 분노 때문에. 힘없는 백성의 서러움 때문에. 그리고 그날 새벽, 도청을 사수하던 친구들이 피 젖은 시체로 실려나갔지. 잊지 말아 달라고 애절하게 호소하던 목소리, 그 목소리가 도서관에서 고시 공부하던 네 가슴 속에 푸드득, 솟구치는 파랑새 울음소리로 양심을 뒤흔들어 견딜 수 없었다고 너는 울었지.

그래, 그렇게 친구들이 죽어나갔는데 나는 노동현장에라도 들어가야지. 대학생이라는 특권을 버리고 현장에 투신한 친구도 있는데 나는 시위에라도 참여해야지. 수배된 친구들을 재워주고 차비라도 건네줘야지. 우리 국민들은 거리에서 아까운 청년 학생들이 저리 희생하는데 음료수라도 한 병 사주고 박수라도 보내야지. 그렇게 양심과 민심이 일렁이고 출렁이면서 저 위대한 6월 항쟁을 이루어낸 게 아니겠니.

우리는 6월의 거리에서 역사를 보았지. 아니 거리에 나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역사였지. 소수의 '질 (質)' 이 저 민심의 '양 (量)' 으로 순식간에 확장되는 역사의 진실을 체험한 우리가 아니냐. 그 80년대의 힘이 마침내 오늘의 정권교체까지 이뤄낸 동력이 아니냐.

수민아. 그새 12년 세월이 거칠게도 회오리쳐 갔구나. 어느덧 30대 중반을 넘어 아이 손을 잡고 나타난 네 모습이 조금은 낯설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그래도 참 좋아 보였어.

요즘 30대 친구들의 가장 큰 관심사가 아이 키우기와 재테크와 자기 계발이라고 너는 쓸쓸히 웃었지. 자꾸 허공에 눈을 던지며 네가 말했던 '두 가지 배신감' 을 나는 생각해 보곤 해. 그래. 지금 우리는 '두 개의 정신적 공황' 을 앓고 있는 것 같아. 우리가 젊음을 바쳐 꿈꾸었던 평등 세상이 사회주의를 통해 실현되리라고 우린 철석같이 믿었던 거야. 그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절대주의.유일주의가 황폐화시킨 삶의 실상을 보게 되었지.

그래서 현실로 돌아와 먹고살고 자리잡느라 정신없이 뛰면서 차 한 대 굴리고 아파트도 하나 마련해 가지고 겨우 자본주의에 적응할 만하니까 IMF사태가 닥쳐온 게 아니니. 자본주의가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 효율과 성능이 좋은 만큼 벼랑으로 치닫는 위험성을 갖고 있음을 이론이 아니라 삶으로 뼈아프게 체험한 셈이지.

그래도 우리 사회에서는 386세대에게 뭔가 '남은 희망' 을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아. 아마도 우리 삶에 밴 세대적 특성 때문이 아닐까 싶어.

정의감과 도덕성에 바탕한 '가치 자원' 을 지닌 세대. 사회와 인간을 거시적으로 보는 논리에 익숙한 '지적 자원' 을 가진 세대. 뜻을 모아 더불어 일하는 조직 경험과 목숨 건 용기로 전 존재를 투신한 체험, 소수의 진리가 결국 승리하는 역사를 겪어본 '경험 자원' 을 갖춘 세대.

이 세대에게 거는 국민들의 기대가 요즘 유행어가 되다시피 한 '젊은 피' 라는 말 속에 함축돼 있는 게 아니겠니. 도덕성과 개혁성을 갖춘 30대가 이 낡고 부패한 정치.사회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맑은 기운을 되살리는 주체가 되기를, 그리하여 80년대에 이어 다시 21세기 새 역사의 주역으로 떠오르기를 간절히 바라는 그 염원을 누가 외면할 수 있겠니. 그러기에 386세대 스스로도 '미래의 주체' 임을 자부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수민아. 너는 고개를 저으며 천만에, 아니에요, 아니에요, 나지막이 부르짖었지. 그러면서 한 친구의 소식을 전해주었지. 늘 운동 주변에서 맴돌 수밖에 없어 괴로워하던 그 친구가 지금까지 소리없이 결식 아동을 돕고 실직자 자녀들을 보살피는 일을 해내고 있다고. 그 친구처럼 비록 작지만 우직하게 생활 속에서 첫마음을 키워가는 친구들이 많다고 너는 말했지. 그런데 운동의 중심에 있던 386세대의 건강성은 무섭게 시들어가고 있다고 아프게 털어놓았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솔직히 386세대에게 수혈해 줄 '젊은 피' 가 얼마나 있니? 국민 앞에 내놓을 만한 어떤 새로운 내용이 있고, 어떤 새로운 운동이 있니? 386세대는 지금 하루가 다르게 보수화되고 있다고 생각해. 그들의 삶은 이미 세속의 욕망과 출세주의에 물들어가고 있어. 정직한 자기 정리도 없이 무한경쟁에 뛰어들어, 명문대 출신이라는 학벌.기득권과 지연.혈연까지 내세워 손쉽게 성공하려는 '불공정 경쟁' 마저 서슴없이 하고 있지 않니. 더 놀라운 건 그런 방식조차 '능력' 으로 치부되고 기껏 질시어린 비판뿐이라는 거야. 무얼 하려는 성공인지, 언제쯤 돈과 힘을 움켜쥐고, 언제부터 그걸 나누고 연대하고 참여하겠다는 건지, 서로가 '묻지마 행진' 이구나.

더 큰 문제는, 삶이 자본주의 행태에 찌들수록 그 반작용으로 '머리' 만 진보로 굳어져서 함부로 남을 단정짓고 쉽게 부정하고 거칠게 냉소하는 거야. 과거 운동했다는 도덕적 오만과 독선은 심각하다 못해 해악스럽기조차 해. 정치.사회적으로는 진보를 말하지만 생활.문화와 감성과 사람 자체는 완고한 보수성에 절어가는 게 아닌가 싶어. 실제 삶이 소시민화될수록 이념만 급진적으로 남아 자기분열은 심화되고 사람마저 앙상해져 가는 걸 나는 지금 참담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거야.

수민아.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미래 희망의 주체를 찾을 수 있을까?

우리의 첫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지난날 우리를 움직인 80년대 정신의 핵심, 그것은 '현장 정신' 이 아닐까. 평등이나 정의를 머리와 입이 아니라 몸으로, 삶으로 살아낸 그 정신. 자신이 누리고 있는 작은 기득권을 원죄인 양 괴로워하던 살아숨쉬는 도덕성. 출세가 보장된 지위를 스스로 벗어버리고 가난하고 힘없는 이웃들 속으로 '현장투신' 하고 '존재이전' 하는 집단적 실천의 힘, 그 장엄한 '현장 삶의 정신' 앞에 온겨레와 세계가 감동한 것이 아니겠니.

나는 이 정신이 앞으로 우리 사회의 1백년을 밀어갈 시대정신이 될 거라고 믿어. 이 80년대 현장정신은 오늘, '나눔' 과 '연대' 와 '참여' 의 정신으로 살아나야 한다고 생각해. 오늘 우리가 먼저 '좋은 삶' 과 '좋은 사람' 의 숲을 이뤄가며 세상을 창조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해.

수민아. 지난해에 출옥한 이후 수개월 동안 전국 곳곳을 다니며 나는 보았어. 자기가 몸담은 분야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조용히, 그러나 착실하게 생활 속의 진보를 실천하면서 나름의 전문성을 키워온 많은 분들을 만났어. 일상에서 작은 원칙과 정의를 힘겹게 지켜가는 얼굴 맑은 사람들. 부당한 사회 관행에 맞서 작은 진실을 끈질기게 밝혀내는 사람들. 머리와 목소리로 부정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 와 있는 미래 가치를 살림으로써, 우리가 넘어서야 할 것들을 물리쳐가는 사람들. 정말 닮고 싶을 만큼 참사람의 향기가 나는 사람들. 나는 그 사람들 속에서 우리시대의 창조적 소수, 진정한 '전위' 의 얼굴을 발견하곤 해.

수민아. 올 여름 휴가 때는 오대산 우통수 (于筒水) 샘터를 함께 찾아가 보고 싶구나. 한강은 여러 산과 계곡에서 흘러든 물이 어우러지지만 그 복판의 줄기를 이루는 것은 우통물이라지. 이 가느다란 우통물의 줄기는 한강으로 스며드는 온갖 물줄기 속에서도 그 푸른 빛깔과 맛을 잃지 않는 조선 제일의 명수라고 하여 다른 물보다 세배의 값을 쳐주었다고 해. 자기를 잃지 않으면서도 다른 여러 흐름을 배척하지 않고 장대한 한강의 중심을 이루기에 옛 선조들은 이를 '강심수 (江心水)' 라 부르며 우러러온 거야.

80년대를 이끌어온 우리 386세대의 현장정신이야말로 맑고도 힘찬 강심수가 아니고 무엇이겠니. 그 시린 첫마음이 오늘 다시 살아나, 갈라진 남북을 아우르고 혼돈의 새 천년을 이끄는 새 푸른 강심수로 빛나기를 모두가 지켜보고 있지 않니. 그런 386세대들이 우리 사회 각 분야, 지방 곳곳에서 뿌리깊게 살아 움직이는 한, 이 나라에 '남은 희망' 은 바로 여기 있다고 굳게 믿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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