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하지 마라, 위험한 직업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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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회고록인『성공과 좌절』이 21일 출간됐다. 노 전 대통령이 남긴 원고지 90쪽 분량의 미완성 원고와 비공개로 인터넷에 올린 글·인터뷰 등을 바탕으로 쓰였다.

그는 검찰 수사를 겪으면서 느낀 심경과 김해 봉하마을 자택에서의 칩거생활의 단면도 소개했다. 서거 한 달 전인 4월 12일 아들 건호씨의 검찰 출두를 TV로 지켜보며 “남의 일이 아니고 내가 당해보니 참 아프다. 카메라도 흉기가 된다”고 적었다. 또 “안방에서 걷는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뒤로 돌아서 다시 하나, 둘…. ‘빠삐용’이란 영화에서 본 장면이 생각난다. 기자들 때문에 마당에도 나갈 수가 없기 때문”이란 대목도 있다. 검찰 조사를 받고 돌아온 권양숙 여사가 “권력은 돈하고 언론하고 검찰에 있다”며 “정치인들은 걸핏하면 감옥이나 들어가고,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말한 것도 소개했다.

◆“김정일, 말이 좀 통할 수 있는 사람이라 느껴”=노 전 대통령은 2007년 10월 2차 남북 정상회담의 비화와 뒷얘기도 소개했다. 그는 “정상회담 첫날은 김정일 아닌 김영남 위원장을 만났다. 남측에 으레 하는 비판을 45분간 장황하게 얘기해 참 힘이 들었다. 그래서 ‘내일 김정일 위원장도 똑같이 (이 얘기를) 반복하면 회담에 무슨 성과가 있겠나’라고 한 다음 자리를 마감했다. 이튿날 만난 김정일 위원장이 ‘먼저 얘기를 하라’고 해서 미리 준비한 30분짜리 기조발언 자료를 설명했다. 그러자 김 위원장은 ‘7·4 공동성명부터 여러 선언들이 지금 보면 종잇장에 불과한 것 아니냐’며 ‘(남측이 제안한) 특구라는 것도 정치적으로 이용만 하고, 실질적으로 이득 본 것이 없다. 개성공단이나 잘해 마무리하고 생각해보자’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노 전 대통령은 “북측이 개혁·개방이란 말에 굉장히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오후에 가보니 의외로 안 된다던 것도 ‘다 좋다’고 해 풀렸다”고 전했다. 김 위원장으로부터 기습적으로 체류연장 제의를 받은 것과 관련, 노 전 대통령은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김 위원장이 ‘그거 결정 못합니까’라고 해서, 평소 버릇대로 ‘큰 건 내가 결정해도 작은 건 내가 못한다’고 말했다”고 적었다.

김 위원장의 인상도 소개했다. 그는 “듣던 대로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이었다. 국정 전반을 아주 소상하게 꿰고 있어 놀랐다. 우리가 개혁이니 개방이니 말하면, 자신의 소신과 논리를 아주 분명히 체계적으로 표현했다. 실무적인 문제에선 상당히 융통성이 있고, 말이 좀 통할 수 있는 사람이란 느낌을 받았다. 북쪽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대화해본 건 아니지만 어쩌면 가장 유연하게 느껴진 사람이 김 위원장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대단히 경직돼 있다는 느낌이었다”고 회고했다.

◆“동거정부·연정은 무리한 욕심 부린 것”=노 전 대통령은 “(재임 중) 성공도 있었고 실패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나를 지배하고 있는 건 성공과 영광의 기억이 아니라 실패와 좌절의 기억들”이라며 “시민으로 성공해 만회하고 싶었으나 이제 부끄러운 사람이 되고 말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동거정부를 생각한 거나 연정, 지역구도를 극복하려고 한 건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무리한 욕심을 부린 것”이라며 “대통령 하지 마라. 너무 많은 금기들(연극관람·골프)이 있고 위험한 직업이며 돈·언론 등 권력수단이 중요하다”고도 했다. 또 “정치인과 언론 모두 개헌하라고 주장하다 막상 개헌 이야기를 2007년 초에 끄집어내니까 전부들 논의를 중단하자며 덮어버렸다. 대선 블랙홀이다”라고 비난했다.

◆“이해찬·한명숙·유시민은 훌륭한 재목”=노 전 대통령은 “이해찬·한명숙·유시민 세 분 다 훌륭한 재목”이라며 “이들의 지지도가 오르지 않는 것에 항상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바람을 잘 일으키는 정치인이 꼭 바람직한 정치인인지는 생각해봐야 한다. 말을 더듬더듬 해도 행적을 봐서 신뢰할 수 있으면 좋은 지도자가 아니냐”고 주장했다. 또 “김대중은 국보급 대접을 받을 만한 지도자이며 김영삼 역시 1987년 이전까지 정치적 업적은 김대중에 못지않다. 그런데 1990년 3당 합당으로 영원히 민주세력의 통합을 불가능하게 만든 사람이 김영삼이라 20년 동안 그가 만든 구도와 싸우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강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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