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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하는 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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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어릴 적 해가 바뀔 때 끝자리수가 홀수인 연도는 좀 심심해 보였다. 짝수해에는 여름 올림픽이 있거나 월드컵이 있다. 6~7월 여름까지 날은 왜 그리 더디 가던지. 감질나게 4년이 아니라 2년마다 하면 안 되는 건지. 스포츠를 사랑하는 건지 아니면 스포츠를 빙자한 국가주의의 철저한 중독자였던 건지 아무튼 세계 최고들의 빅이벤트는 늘 우리를 설레게 했다. 홀수해마저 풍성해진 건 WBC 야구대회에다 미국 야구, 유럽 축구 같은 월드클래스 무대에서 활약하는 선수가 늘어나면서다. 거기에 세계수영선수권대회·피겨선수권대회 같은 스케줄까지 늘어나니, 이젠 예전처럼 목 빠지게 몇 년씩을 기다리지 않아도 ‘태극전사들의 드높은 기상’이 세계만방에 퍼지는 감격을 맛보게 됐다.

하지만 기다림이 짧아진다고 설렘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나를 포함한 어떤 사람들에게 지금 하루라도 빨리 10월이 왔으면 싶은 건 추석 때문도 단풍 때문도 아니고 김연아 때문이다. 3월에 세계선수권 대회를 끝으로 시즌을 마친 김연아가 다음 달이면 파리에서 열리는 에릭봉파르 대회를 시작으로 올 시즌을 시작한다. 겨우 일곱 달 간격인데 팬들로서는 정말 지루한 시간이었다. 새 음악 007이나 거슈윈의 피아노 협주곡을 편집해 기존 연아의 경기 영상에 맞춰보며 새 프로그램이 어떨까 상상해보고 흐뭇해하곤 하는 것이 팬카페에서 흔히 벌어지는 비시즌 풍경이다.

3년 만에 세계 정상에 오른 지난해 보여준 ‘차원이 다른’ 연아의 실력 때문에 올해 기대는 정말 크다. 게다가 올 시즌의 마지막은 2010 밴쿠버 겨울 올림픽. “금메달입니다!”라는 감격에 찬 소리를 듣는 상상이 벌써부터 팬들의 머릿속에 꽉 차 있다. 사실 큰 이변이 없다면 그러리라고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그런데 이 ‘모두가 의심치 않는’ 데서 걱정은 시작된다. 미끄러운 얼음판 위에서는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 만의 하나, 상상하기도 싫지만, 연아가 우리가 바라는 시즌 피날레를 금메달로 장식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팬들은 또 박태환 선수에게 그랬던 것처럼 정신적 태만과 CF 등을 운운하다 결국엔 ‘태극전사의 기상’이 부족함을 탓하며 비난을 쏟아부을까. 아, 생각만 해도 끔찍한 풍경이다.

연아의 성취가 놀라운 건 피겨스케이팅의 동토에서 꽃을 피워 올린 점도 그렇지만 한번도 슬럼프에 빠지지 않고 앞으로만 발전해 왔다는 점이다. 하지만 연아 역시 사람이다. 그도 좌절할 수 있고 컨디션이 나빠질 수도, 그저 운이 나빠질 수도 있다. 팬이 되려면 러츠니 플립이니 하는 용어 하나 더 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그를 지켜볼 줄 알아야 한다. 100만분의 하나 그의 은메달과 그의 슬럼프까지도. 그리고 확실한 것 하나는 그는 태극 ‘전사’가 아니다. 금메달은 그가 꼭 따내야 하는 신성한 의무가 아니다.

선수도 이기고 지지만 팬도 승리하거나 패배하는 팬이 될 수 있다. 스포츠의 진짜 묘미는 가슴 터질 듯한 승리의 감동이나 죽어버리고 싶은 패배의 아픔에만 머물러선 맛보기 힘들다. ‘항상 또 다른 기회가 있다’는 점을 새겨야 한다. 진짜 ‘승리하는 팬’이 되려면 멋지게 몰입해 경기를 즐기고, 또 다른 기회를 바라보며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이윤정 문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