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역사가 말하게 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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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개혁과 과거사 정리가 정부와 여당의 시대정신이 되고 있다. 여권(與圈)은 두개의 사안을 얽힌 것으로 보고 있다. 개혁이라는 것이 과거와 현재의 잘못된 것을 바르게 고치자는 것이어서 개혁을 위해선 굴절된 과거사의 정리가 불가피하다는 논리다.

과거사와 현존 제도가 개혁을 위한 걸림돌이 된다면 그것을 정리하는 것은 오늘의 당연한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그 작업은 상시적으로 이뤄져야 하며, 또 권장돼야 할 일이다.

문제는 과거사를 어떻게 정리하느냐는 방법론에 있다.

참된 개혁은 소극적으로 과거의 잘못된 것만 광정(匡正)하는 데 그쳐서는 안되며, 적극적으로 과거의 잘한 것도 평가해 그것을 발전시킬 때만 힘을 발휘한다. 그러자면 오늘의 개혁과 과거사 정리는 양 측면을 고루 다루어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고, 발전시켜야 할 것은 더욱 장려해야 한다.

예컨대 박정희 시대의 명암을 반추한다면 유신체제에 의해 발생한 폐해에 대한 진상을 엄정하게 규명해 희생자를 신원(伸寃)하고, 후대가 그런 전철을 다시 밟지 않도록 교훈을 남길 필요가 있다. 동시에 박정희 시대가 성취한 조국 근대화가 어떤 국가경영의 방책에 의한 것인지도 폭넓게 연구해 그 경륜과 예지를 적극 승계하는 원숙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역대 집권세력이 당대에 과거사 정리를 방해했거나 소홀히 했던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이승만 정부는 국회의 반민특위에 회부된 수백명의 친일파 청산작업을 좌절시켰다. 그 죄업이 광복 후 두 세대나 흐른 지금 우리를 새삼 옥죄고 있다는 것은 천추의 한이다. 30, 40년 전 군사정부들의 악행이 요즈음 드러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안들은 당대에는 실정법의 구멍을 용케 빠져나갔지만 결국 역사의 단죄를 피할 수 없다는 냉엄한 진실을 일깨워준다. 실정법상 단죄의 시효는 있지만 역사의 시효는 없기 때문이다. 역사가 무서운 까닭이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과거사 정리에 대한 하나의 준거 틀을 제공한다. 실정법의 시효를 넘긴 사안은 역사의 판단과 처벌에 맡기라는 것이다. 정부와 정치권은 관련 학계가 그것들을 활발하게 연구할 수 있도록 정부 보관자료를 충실히 제공하고 넉넉한 연구환경의 조성에 최대한 협조.지원하는 체제를 갖추는 것이 순리다. 정치가 역사를 해석하지 말고, 사실이 역사를 말하도록 하는 방법이다. 그것이 역사의 정치화를 막는 동시에 역사의 교훈이 참된 개혁의 밑거름으로 작용하는 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여권이 추구하는 오늘의 과거사 정리가 과거 잘못에 대한 책임추궁에만 초점을 두려는 경향은 여간 불안스럽지 않다. 박정희는 25년 전 부하의 총탄을 맞고 목숨을 잃는 것으로 독재에 대한 징벌을 받았다. 반면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가난을 해방시킨 경제건설의 기적은 박정희에 대한 긍정과 향수의 원천이 되고 있다. 여권이 새삼 그의 잘못된 점만 드러내 그를 정치적으로 다시 부관참시(剖棺斬屍)하려는 것이 이 시대 개혁의 요체여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부정적 측면만 들춰내는 한풀이식 과거사 정리라면 필경 집권세력 중심의 파당적 역사 해석 시도를 통해 반대급부를 노리는 정치적 복선을 깔고 있다는 반발과 갈등만 부추길 것이다. 이런 오해를 피하고 참된 개혁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여권은 현대사 연구의 지원체제를 확립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과거의 공과를 엄정하게 가려낼 수 있을 것이다. 그 결과는 우리로 하여금 잘못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잘한 것을 더욱 발전시키도록 유도할 것이다. 그것이 국력신장을 이끌 나라의 정신적 기조가 된다면 참된 개혁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처럼 정부와 여당은 개혁을 위한 과거사 정리에 현명한 지도력을 발휘해주기를 간곡히 바란다.

김인섭 법무법인 태평양 명예 대표변호사

*** 바로잡습니다

8월 20일자 34면 '역사가 말하게 하라' 제하의 시론 중 '부관참시(副棺斬屍)'의 副를 剖로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