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12년 만에 다시 붙은 ‘한은법 개정’ 맞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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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날 모습은 전혀 달랐다. 미소는 사라졌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소속 기관의 논리를 폈다. 마치 12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1997년에도 두 사람은 당시 재정경제원 금융정책실장과 한국은행 기획부장을 맡아 한은법 개정 논란의 최선봉에 서 있었다.

◆윤 장관은=이번에도 논란의 핵심은 감독권이다. 지난 4월 임시국회에서 기재위는 소위를 만들어 한은법 개정안을 마련했다. 한은의 설립 목적에 ‘물가안정’과 함께 ‘금융안정’ 기능을 추가하고, 금융회사에 대한 단독 조사권을 한은에 주자는 것이 골자다. 하지만 반론이 만만치 않아 당시 기재위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대신 정기국회 시작 전까지 정부 안을 내도록 요구했다.


재정부는 입장을 정리하기 위해 국민경제자문회의에 의견을 물어 최근 답을 받았다. 지금 한은법을 고치는 것은 시기적으로 적절치 않지만, 그래도 개정한다면 한은의 목적에 ‘금융안정 기능’을 추가하자는 내용이다. 한은이 자료 제출을 요구할 수 있는 대상을 보험·카드·자산운용사 등으로 확대하는 내용도 담겼다. <본지 9월 17일자 e4면>

윤 장관은 자문회의 결론 가운데 “시기적으로 적절치 않다”는 쪽을 강조했다. 그는 “개편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고 주장했다. 아직 금융위기가 끝나지 않아 할 일이 많은데, 자칫 소모적인 싸움에 휘말릴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선진국들도 비슷한 논의를 하고 있으니 그 결과도 반영하려면 내년께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의원들로부터 “안일한 자세” “시간 끌기”라는 질타가 쏟아졌지만 윤 장관은 “이틀 전 한은과 양해각서를 체결한 만큼 시급한 문제는 모두 해결됐다”며 버텼다.

◆이 총재는=이 총재도 밀리지 않았다. 회의장 분위기가 한은에 우호적인 터라 그의 말은 단호했다. 이 총재는 “국민경제자문회의 TF에 한은 입장을 제출했지만 결론은 우리 생각과 차이가 많다”며 말을 꺼냈다. 그는 “감독당국을 뒤따라 갈 수밖에 없는 현재의 형태로는 중앙은행이 금융권 유동성 지원 등 위기 대응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이어 “금융안정에 대한 책임이 명시적으로 부여되면 금융불안이 누적될 때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게 되고, 한은의 자금 능력을 활용하는 경우에도 강도와 속도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이틀 전 금융감독 당국과 체결한 MOU의 효과에 대해 이 총재는 “구두 위로 발을 긁는 것과 직접 긁는 것은 다르다”며 충분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또 “현실적으로 합의를 도출할 수 있는 부분은 이번에 처리하고 남겨진 과제는 다음에 논의하자”며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개정안 처리될까=회의 분위기만 봐서는 정부 쪽에 불리한 구도다. 여야가 한목소리로 개정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민주당 강봉균 의원은 “기관 간 완전한 합의는 영원히 안 될 것”이라며 “정부가 못한다면 국회에서 처리하면 된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김성식 의원도 “국회가 1년 넘게 고민해 개정안을 만들었으니 그대로 가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기재위 문 밖을 나서면 사정은 사뭇 다르다. 당장 여당 지도부는 한은법 개정에 뜻이 별로 없다. 기재위와 달리 금융위· 금감원을 관할하는 정무위는 여야가 만장일치로 법 개정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게다가 MOU 체결로 굳이 한은법을 개정해야 할 명분이 줄었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최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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