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부드러운 소주' 경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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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3세기 말 중국 원 (元) 나라에서 제조되기 시작한 소주가 한반도에 건너온 것은 고려 말이었다.

도입 초기의 소주는 순수한 곡식으로 만들어져 맛이 특이하고 독한데다 뒤끝이 깨끗해 인기가 매우 높았으나 값이 매우 비싸 고관대작들이나 즐겼을 뿐 서민들은 마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서민들은 약으로 쓰려 해도 구할 길이 없어 영조 (英祖) 때는 한동안 '말많고 탈많은' 소주의 금주령을 내린 일도 있었다.

조선조에 소주가 얼마나 귀한 술이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신래침학 (新來侵虐)' 에 얽힌 이야기들이다.

신래침학이란 처음 관리로 등용된 신참이 선배들에게 한턱 내는, 요즘 말로 하면 신고식이다.

이때 선배들은 소주가 아니면 응하는 법이 없었고, 신참들은 한번 신고식에 서너달치 봉급에 해당하는 소주를 구해야 했기 때문에 가산을 탕진하는 일도 잦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소주가 대중적인 술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한 것은 조선조 말기부터였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전국에서 소비되는 소주의 대부분을 생산했던 곳은 지금 서울의 공덕동인 공덕리였다.

이곳에는 1백여개의 양조장이 세워져 연간 1천섬 이상의 소주를 생산했다.

일제 (日帝) 때 본격적인 기업체계를 이뤘다가 해방 직후의 극심한 식량난 때문에 한때 미곡을 원료로 하는 양조의 금지령이 내려져 생산이 중단되는 등 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오늘날 소주는 '이 땅의 가장 사랑받는 술' 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소주가 우리 사회에서 그처럼 안정적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특유의 맛과 싼 값, 그리고 25도의 알콜 도수를 선호하기 때문일 것이다.

재래식 소주는 본래 20도, 25도, 30도, 35도의 네가지로 제조돼 술꾼들이 입맛에 맞는 소주를 선택할 수 있었으나 차츰 25도로 통일되는 양상을 보인 것이다.

그래서 '알콜 농도 25%, 용량 3백60㎖' 가 소주의 표본처럼 여겨져 왔으나 술꾼들의 입맛도 변하는지 요즘에는 낮은 도수와 작은 용량의 소주가 큰 인기를 끌어 업체들의 경쟁이 치열하다고 한다.

독한 술을 적게 마시기보다 부드러운 술을 많이 마시겠다는 생각도 작용했을 게다.

소매가격 6백원 안팎인 소주값이 올 하반기부터 수입양주의 세율이 적용되는 탓에 1천원으로 오른다는 예고도 있었으니 이래저래 소주파들의 부담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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