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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포럼] '늙은 피' 기죽지 말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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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이 젊은 피 수혈론을 제기한 이후 여의도 정가 (政街)에 '피바람' 이 불고 있다고 한다.

우스갯소리로 국민회의가 '흡혈당' 으로 불리고, 영입대상에 오르내리는 젊은이들이 나타나면 '젊은 피 좀 먹자' 는 농담 겸 비아냥도 가관이라고 한다.

야권 또한 무풍지대는 아닌 것 같다.

한나라당도 "신진엘리트들이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대폭 확대하겠다" 고 다짐한 터다.

나이 30대 - 80년대 학번 - 60년대 출생의 '386세대' 들이 떠오르고, DJ가 탐을 낸다는 '젊은 피 명단' 까지 나도는 판국이다.

낡고 퇴행적이고, 경쟁력 없는 다선 (多選).고령의원들을 신진기예로 갈아치워 정치판을 바꿔놓겠다는 데 이를 마다할 사람은 없다.

한가지 걱정은 '젊은 피' 바람이 사회각계로 확산되면서 곳곳에서 '구세대 몰아내기' 의 세대간 갈등으로 증폭되는 경향이다.

43년생, 45년생 하는 식으로 선을 그어놓고 그 이상 '늙다리' 들은 일제히 목을 치는 직장들도 적지 않다.

젊은 피가 싱싱하고 활력이 넘친다고 '무서운 아이들' 일색으로 판을 짠다면 그 조직이 어떻게 될까. 소위 '새 피' (new blood) 는 조직문화와 가치관.사고 및 행동양식이 기존과는 다른 요소를 끌어들여 조직에 생기를 불어넣고 활성화시키는 작업으로, 엄밀히 말해 나이와는 관계가 없다.

'젊은 피' 만이 곧 '새 피' 는 아니며, 기존과 외래와의 화학적 통합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함으로써 비로소 생명력을 갖는다.

젊은 피의 상징으로 회자되고 있는 '386세대' 는 흔히 '격동의 80년대를 겪으면서 세대간 통합력이 높고, 정치적 훈련이 비교적 잘 돼 있으며, 역사적 대의 (大義)에 충실하다' 는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21세기 한국사회의 대안 (代案) 세력으로서 이들의 정체성 (正體性) 과 비전, 전문성과 문제해결 능력은 미지수다.

'386' 세대는 미국에서는 X세대다.

TV를 보고 자랐고, 컴퓨터에 접근한 최초의 세대다.

이념보다는 실용적이고, 영향력행사보다는 시민적 책임을 앞세우는 열린 세대들이다.

반면 우리 '386' 세대의 상당수가 재야나 운동권출신이다.

배타적이고 비타협적이고 때론 폭력적인 투쟁경험에 젖은 이들도 적지 않다.

운동권참여나 시민운동은 그 자체로 평가받아야지 정치권 진입의 '훈장' 으로 통한다면 그 순수성은 물건너 간다.

개중에는 '늙은 젊은이' 도 없지 않고, 이런 유의 '새 피' 가 우리 정치발전에 도움된다는 보장도 없다.

더구나 현재의 30대는 우리사회에서 가장 '문제아' 라는 교육학적 분석도 있다.

부모 세대들이 워낙 고생을 해 저마다 '자식들만은…' 하며 감싸 키우는 바람에 자기만 알고, 자립심과 참을성이 부족하고, 쉽고 편한 것만을 추구하는 경향이라고 한다.

30대를 깎아내리는 의도는 전혀 아니고, 현 기성세대들이 모두 자식교육을 망쳐 놓았다는 누워 침뱉기식 자기반성의 한 고백이다.

우리사회는 인재가 부족하고 전문가가 드문 '아마추어 사회' 다.

그럼에도 그 얼마 안되는 인재나마 아낄 줄을 모른다.

'3공사람' '5공사람' 'YS사람' 하고 제치다보면 쓸 사람이 없다.

막대한 사회적 투자로 길러놓은 인재들을 1회용품처럼 한번 쓰고 버린다.

국가단위로 인재 풀 (pool) 을 만들고 정권을 초월해 이들을 국가차원에서 관리.활용하는 시스템과 문화가 없기 때문이다.

DJ정부 또한 도리없는 아마추어 정부다.

미국같이 틀이 잡힌 사회에서도 클린턴정부는 한동안 고전했다.12년만에 정권을 잡고 보니 민주당주변에 정책과 실무경험을 가진 인재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50년만의 정권교체' 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럴수록 중요한 것은 인재의 규합이요, 외부영입 즉 아웃소싱이다.

직급파괴 - 서열파괴 - 영역파괴, 그리고 '나이파괴' 여야지 2분법적인 '늙은 피의 숙청' 이어서는 안된다.

TV에 얼굴 팔린 인사나, 검증되지 않은 젊은 피 위주의 충원은 값비싼 시행착오만 되풀이할 뿐이다.

'새 피' 는 젊은이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진정한 새로움은 미래지향적 가치관과 글로벌 마인드, 그리고 부단한 자기쇄신에서 나온다.

올해 76세인 싱가포르의 리콴유 (李光耀) 는 "배움을 한 순간도 멈춘 적이 없고, 배움을 멈추는 날이 곧 죽는 날" 이라는 신조로 살고 있다.

그 배움은 곧 새로움에로의 부단한 도전이다.

미국에서 유행하는 조크 한 토막이다.

52세된 중년에게 나이를 묻자 "스물두살에 30년 경력" 이라고 답했다.

마음은 20대, 플러스 30년 축적이 있다는 자부다.

길로틴의 피바람 공포에 주눅들린 '늙은 피' 들이여 기죽지 말지어다.

변상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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