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411.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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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제8장 도둑

태호의 제안도 놀랍고 엉뚱했지만, 더욱 놀라운 사실은 희숙이가 솔깃해한다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휘발유통을 들고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만용과 다를 것이 없었다.

여권을 만든 다음에 태호가 생각하고 있는 행각도 봉환으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배를 타고 중국으로 드나들면서 보따리 장사를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출어 (出漁) 하는 어선을 가장하고 서해로 나가 선상밀매 (船上密賣) 한 수백마리의 뱀을 비무장지대에서 잡은 뱀으로 둔갑시켜 거래를 트다가 적발된 밀수범이 도주한 것이라면, 아무리 미련하고 아둔한 경찰조직이라 하더라도 전국에 수배령이 내렸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지명수배자에게 여권을 내줄 미련한 행정조직이 존재하고 있다는 얘기는 아직 듣지 못했다. 그런데 한 발 더 나아가 여권까지 만들어 중국을 무대로 본격적인 보따리 장사를 시작하자는 태호의 제안은 골백번을 되씹어 봐도 정신 나간 소리였다.

그 제안이 너무나 어처구니없어 희숙에게 웃자는 뜻으로 한마디 슬쩍 흘려 본 것이었다. 그런데 듣고 있던 희숙이가 정색을 하고 쓴웃음 짓고 있는 봉환에게 왜 웃느냐고 따지고 든 것이었다.

태호가 그토록 어려운 제안을 했을 때는 앞뒤를 분간 못하는 철부지들처럼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진 않았다는 것이 희숙의 일깨움이었다. 물론 그 역시 불법으로서만 가능하다는 것은 봉환도 짐작하고 있었다.

바로 그러한 것에 봉환의 두려움이 있었다. 범죄의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래서 올곧은 삶을 포기하고 막가는 사람만이 생각할 수 있는 발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봉환은 태호보다 희숙에게 절망을 느꼈다. 일생을 같이할 남편감으로 선택한 사람이 범죄의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수수방관의 수준을 넘어 오히려 부추기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봉환이란 자연인 이외의 어떤 것을 겨냥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전업적인 도둑의 아내라 할지라도 그렇게 가혹하고 야비한 발상은 있을 수 없었다. 희숙은 그와는 달랐다. 그녀는 변측과 요령으로 일관돼 온 우리 사회의 어둡고 음습한 관행에 은연중 매혹돼 있는 것 같았다.

봉환에 대한 수배는 흐지부지될 것이란 예측은 태호와 입을 맞춘 듯이 똑같았고, 몇 푼의 뇌물이면 오색에 방치한 용달차도 수월하게 찾아올 수 있으리란 예측도 태호의 주장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봉환이가 범죄자란 지목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고, 범죄자가 아니라면 중국을 드나들기 위한 여권도 받아내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근력으로 때운다는 보따리 장사는 이익은 최대치를 겨냥할 수 있으면서도 밀수 아닌 합법적인 장사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도대체 아귀가 들어맞지 않는 억지로만 여겼는데, 그녀와 삿대질까지 해가며 줄기차게 입씨름을 나누는 동안 봉환 자신도 모르게 그녀가 의도했던 쪽으로 기우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용달차를 안면도까지 회수하는 번거로움은 봉환이가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희숙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태호의 태도 역시 자신만만했기 때문에 봉환도 어차피 한풀 꺾일 수밖에 없었다.

"태호 봐라. 니하고 희숙이하고 둘이서 나를 뒤흔들어서 멀쩡했던 사람 병신 맨들라카는거 아이제? 니 혼자 힘으로 뒤탈없이 용달차를 회수할 수 있다면, 니 말대로 사주팔자에 없었던 중국땅 한번 밟아보는 기다. 하지만 니가 만약 실패하면 그때부터 니하고 내하고는 평생 등지고 살아야 된다는 각오는 돼 있제? 내 말 웃자고 하는 소리 아이데이?"

"형이 마음을 바꾸었다니까 갑자기 긴장되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나도 농담 아니었으니까 오금 박고 들지 마. 내 몸 하나 불살라 버릴 작정하고 대들면 안되는 일이 어디 있겠어. 사지가 멀쩡한 젊은 놈들을 허리디스크 환자로 분류해 군대 안 보내는 것을 일같잖게 저지르는 세상이라는 건 형도 알고 있지? 하물며 뱀을 황소라고 팔고 다녔다면 몰라도 뱀을 뱀이라고 팔고 다닌 게 도대체 무슨 죄가 된다고 쪽을 못쓰고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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