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409.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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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제8장 도둑

"니 말이 옳다. 내 죽고 니 살면 살아 봤자 죽은 거나 마찬가지 아이겠나. 용기를 내야제" "하지만, 장차 살아갈 것이 고단할 건 틀림없어. 난 언니 곁에 그대로 있어도 되겠지만, 자기는 이제 그럴 수 없잖아. 자동차도 정말 포기해야 돼?"

"니 자꾸 말 시킬래? 안 그래도 뒤숭숭한 복장을 억시기 들쑤셔쌓네?" 백사장 포구에 당도한 것은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오후 8시쯤이었다.

사주경계를 게을리하지 않고 안심해도 좋다는 것까지 탐지하고 찾아 들어간 서문식당에는 안씨 부부는 물론 구례 장터를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추었던 태호가 기다리고 있었다.그들은 봉환의 전화로 사태의 대강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낙심천만이었다.

희숙은 언니를 만나자마자, 그 동안 가슴 속에 눌러 놓았던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소스라친 언니는 엉겁결에 식탁 위에 올려 놓았던 물걸레로 희숙의 입을 틀어막으며 방으로 끌어들였다.

안면도까지 돌아오는 차중에서 나름대로는 골똘하게 궁리를 해봤지만, 이렇다 할 묘책을 찾지 못했던 봉환으로선 태호가 나타난 것이 무작정 반가웠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지만, 안씨도 뾰족한 방안이 있을 수 없었다. 자신이 꼬드겨서 봉환을 끌어들였지만, 밀수행위란 것이 들통났을 때나 경찰의 수배를 받았을 때의 대비책이란 처음부터 염두에 둬 본 적도 없었다.

삼십육계 중에서도 줄행랑이 으뜸이란 것만 믿고 검색을 당하면, 무작정 튄다는 작정이 안씨가 고려하고 있었던 대비책의 전부였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사히 도망해서 도망이 성공한 다음의 대비책을 강구할 때였다. 당장 도망한 것은 손쉬웠지만, 지금은 경찰서를 찾아가 자수하지 않는 이상, 수배를 어떻게 따돌리고 살아 남느냐가 문제였다.

안씨는 용달차까지 포기한 봉환의 경솔함을 꾸짖으려 들었다. 그러나 희숙을 살려야 하겠다는 생각 때문에 용달차를 포기하게 되었다는 말을 봉환은 하지 않았다.

지금 와서 그따위 꼬질꼬질한 정상을 따져 보았자, 차후의 대비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태호의 한 마디가 대범하고 고마웠다.

"결론부터 말하면, 형이 차를 단념한 것은 잘한 일이라구. 경황 중에 저지른 임기응변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라구. 형이 경찰에 주민등록증도 제시하지 않았다는 것도 칭찬 들을 만한 일이야. 도매상도 형의 인상착의는 대강 알고 있겠지만, 현주소는 물론이고 이름조차 알려준 적이 없었다면, 철통 같은 수사를 벌인다 해도 겉돌 수 밖에 없어. 자동차에 미련두고 운전하고 도망쳤더라면 경찰이 물론 지체없이 뒤쫓았을테고, 그렇게 되면 응당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졌겠지.

반드시 교통사고가 났을 것이고, 설령 사고가 나지 않았다 할지라도 한두 시간도 못가서 덜미가 잡히게 마련이었어. 형도 첩보영화나 마약상을 뒤쫓는 영화 봤었지? 자동차로 쫓기던 범인은 반드시 충돌사고 일으키고 잡히거나,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서 화재를 일으키고 잿더미로 변했잖아.

형을 놓친 경찰은 차적 (車籍) 을 조사하겠지. 그러나 차적은 서울인데, 그 차가 서울 떠난 지 오래 전 일이고, 차주도 형 이름으로 된 것이 아니잖아. 그깟 똥차 팔아 봐야 백만원도 못 받을 걸 아득바득했다간 운수에 없는 빵간 신세질 뻔했잖아. 잘했어. 아주 잘했다구. " 태호의 말은 전혀 모순이 없을 뿐만 아니라, 너무나 그럴싸해서 눈물이 쏟아지려 하였다.

그러나 당사자인 봉환의 경우는 태호의 말처럼 툭 털고 잊어버릴 단순한 사건은 아니었다. 태호에겐 남의 일이기 때문에 그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단념하진 않을 거야. 경찰이 밥 먹고 하는 일이 뭔데" "형 아직도 내 말 못 믿겠어? 차적이 서울이기 때문에 사건을 반드시 서울시경으로 이첩할 거라구. 서울로 이첩되면, 이 정도 사건은 날샌 거라구. 시큰둥해서 거들떠보지도 않아. 서류함 밑바닥에서 빙빙 돌고 있는 것도 눈에 거슬려서 나중엔 찢어버릴 거라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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