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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다리 100년] 민족애환 서린 '한강기적'의 상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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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올해로 한강다리 건설 1백년을 맞는다.

1900년 7월 한강철교가 개통됨으로써 한강에 다리시대가 열렸다.

서울의 강남.북을 연결하는 한강다리는 서울 발전의 상징물이자 우리 민족의 애환이 담긴 곳이기도 하다.

도강 (渡江) 이라는 '편리' 와 붕괴가 가져온 '불안' 의 이미지가 공존하는 한강다리 그 1백년사를 짚어본다.

◇ 현황 = 현재 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한강.양화.한남대교 등 서울시계 20개와 경기도 수계의 행주.팔당.강동대교를 포함해 모두 23개. 이중 21개가 사용중이고 광진교와 당산철교는 상부를 철거한 뒤 다시 건설중이다.

여기에 청담대교가 올 연말,가양대교가 내년말 완공을 목표로 공사중이다.

인천국제공항과 자유로를 연결하는 방화대교는 2000년말 완공된다.

최초의 근대적 한강다리인 한강철교는 1896년 미국인 모스가 경인철도 부설권을 따낸 뒤 4년 후인 1900년 완공했다.

이후 17년만에 현재 한강대교의 전신인 한강 인도교가 등장했다.

한강다리가 본격적으로 건설되기 시작한 것은 경제개발이 시작된 60년대부터. 65년 처음으로 한국 기술진에 의해 양화대교가 건설됐다.

시민들은 공사비를 보태기 위해 절미운동까지 벌였으며, 개통식은 장안의 화젯거리가 됐다.

이어 69년 한남대교가 건설돼 강남개발에 불을 붙였다.

70년대 들어 여의도를 뭍으로 바꾼 마포대교가 완공되고 이어 강남개발이 가속화하면서 잠실.영동.천호.성수대교와 잠실철교가 개통됐다.

80년대 들어서는 성산.양화신교.원효.한강신교.반포.동작.동호대교 등이 1~2년만에 하나씩 한강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90년 올림픽대교가 개통된 뒤 한동안 건설이 뜸하다 96년 서강대교가 가장 최근 개통됐다.

한강다리를 통해 오가는 교통량은 99년 현재 하루 1백80만여대. 서울시내 및 시계를 통과하는 차량의 절반 정도가 한강교량을 지나는 셈이다.

한강다리는 서울의 주요 '병목' 으로 꼽히고 있다.

한남대교 (17만대) 를 비롯, 영동대교 (16만대).잠실대교 (12만4천대) 등 다리의 절반 이상이 이미 포화상태. 30년도 내다보지 못한 채 설계된데다 진.출입 램프가 잘못 연결돼 있는 것이 주요 원인이다.

◇ 애환이 서린 곳 = 사연이 가장 많이 담긴 다리는 한강대교다.

일제시대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 다리를 건너 만주나 남양군도로 끌려갔으며, 6.25 때는 한강철교.광진교와 함께 국군의 '작전상 폭파' 로 끊기는 비운을 맞았다.

당시 다리를 건너던 피난민 4천여명 중 8백여명이 무고하게 희생됐다.

또 5.16 쿠데타 때는 혁명군과 혁명저지군이 처음 조우한 역사적인 현장으로 기록된다.

노량진~용산을 잇는 한강대교는 한강철교 공사에 쓰고 남은 자재를 이용해 1917년 개통됐다.

수심이 깊은 노량진~노들섬 구간은 한껏 멋을 부린 아치교로, 노들섬~용산 구간은 가교로 건설됐다.

이 다리는 사람과 우마차를 위해 놓였다 해서 인도교로 불렸다.

한강대교는 82년 기존 다리와 똑같게 하나가 더 건설돼 쌍둥이 다리가 됐다.

동작구 동작동~용산구 이촌동을 잇는 동작대교 또한 민족사를 반영하고 있다.

84년 개통됐지만 아직도 용산 미군기지로 인해 '미완의 다리' 다.

당초 용산 미8군 기지를 관통해 후암동 길을 통해 도심과 직결되게 설계됐으나 미군 당국의 '승낙' 을 받지 못했다.

동작대교 길은 미군기지 앞에서 좌우 직각으로 꺾여 강북 도심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 붕괴와 부실의 대명사 = 94년 10월 21일 아침 성수대교 중간부분이 폭격을 맞은 듯 두 동강나며 무너져 내렸다.

출근길 시민 32명이 목숨을 잃었다.

고작 15년만에 내려앉은 성수대교는 '빨리빨리' 만 외치던 우리의 건설문화와 안전불감증에 일대 경종을 울렸다.

이후 성수대교는 총체적 부실의 대명사, 외국인 관광객이 몰려드는 '낯 뜨거운 명소' 가 됐다.

성수대교 붕괴로 다리의 '유지.보수.관리' 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이전까지 다리는 짓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인식됐다.

서울시는 한강다리 전체의 안전을 점검, 4천1백여건의 결함을 발견하고 대대적인 보수공사에 들어갔다.

94년 2백99억원에 불과하던 시설물 안전점검 예산은 1년새 무려 5배 (1천5백3억원) 나 늘어났다.

개통 12년7개월만에 철거된 당산철교도 부실시공의 오명을 갖고 있다.

당산철교는 92년 전동차의 하중을 직접 받는 세로보에서 균열이 발견된 뒤 갈라진 곳이 계속 늘어나 '짧은 생' 을 마감했다.

59억원을 들여 시공된 다리가 12년만에 12억원의 고철로 변한 것

당시 한국강구조학회 등은 "유지보수 만으로 10년이상 사용할 수 있다" 며 "서울시가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 격' 으로 성급히 당산철교를 철거한다" 는 지적을 하기도 했다.

이밖에 올림픽대교와 신행주대교.팔당대교 등이 완공 후 또는 건설 중에 부분적으로 무너져 내려 한강다리가 안전에 있어서는 후진성을 면치 못한다는 오명을 뒤집어쓰는 데 일조했다.

◇ 신기술의 시험장 = 한강다리는 고전적 공법에서 최신 방법까지 건설 당시의 토목기술이 총동원돼 건설됐다.

양화.한남.마포대교 등은 교각 위에 상판을 얹는 가장 단순한 공정으로 건설됐다.

이후 미관과 기능을 살린 트러스 공법이 등장했다.

이는 교각 위에 강재로 만든 구조물 (트러스) 를 얹어 하중을 견디는 방식. 성수.성산대교는 교각사이의 거리가 1백20m나 되는 대표적인 '롱다리' 다.

외관상 서울의 상징다리라 할 수 있는 올림픽대교는 처음으로 현상공모에 의해 사장교 (斜張橋) 로 건설됐다.

사장교는 다리 가운데 탑을 세우고 강선으로 연결시키는 방식. 올림픽대교의 경우 탑의 기둥을 4개로 해 우주만물의 근원인 연월일시와 동서남북.춘하추동을 나타냈다.

양쪽에 12개씩 24개의 강선으로 24회 올림픽을 상징했으며 높이를 88m로 하는 등 올림픽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60%의 덤핑입찰로 올림픽이 끝난 뒤인 90년에야 완공됐다.

철새도래지인 밤섬의 차량소음이 전달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교량 난간에 투명한 방음벽을 설치한 서강대교는 독특한 모양의 닐센아치교로 거듭나는 한강다리의 선두주자임을 자부 (?) 하고 있다.

올 연말 완공예정인 청담대교는 지하철 7호선과 자동차가 함께 다니는 복층교량으로 건설된다.

◇ 새로운 천년의 다리 = 서울의 상징물이자 역사에 남을 만한 다리를 만드는 것은 21세기 한강다리 건설의 과제다.

다리는 한 나라의 문화.정신과 기술의 결집체라고 한다.

활.기와지붕 등 전통 곡선을 살린 설계는 한국 미래 다리의 한 모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안전하고 튼튼한 다리 건설은 무엇보다 우선시돼야 한다.

이를 위해 충분한 예산과 시간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건설비용에 버금가는 유지비용을 들여 전문인력이 관리하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는 새로운 세기에도 여전히 한강다리의 모델이다.

◇ 도움말 주신 분 = 손정목 (孫禎睦) 서울시립대 명예초빙교수, 황학주 (黃鶴周) 연세대 공대 명예교수, 변근주 (邊根周) 연세대 공대 교수, 장석효 (張錫孝) 서울시 건설안전관리본부장, 김영걸 (金永杰) 서울시 도로계획과장

문경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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