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책넘나들기] '권리의 경제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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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 권리의 경제학 (원제 : THE COST OF RIGHTS) 스티븐 홈즈.캐즈 선스틴 지음, W.W.노턴 & Co. 발간

봉건적인 전근대사회에서는 권리보다 의무가 사회관계를 규정하는 1차적요소였다.

특히 조직의 주변부에서 중심부를 대하는 입장은 의무만으로 일관했다.

영주는 왕에게, 백성은 영주에게 의무만을 가졌던 것이다.

그래서 왕에 대한 영주의 권리를 밝힌 1689년 영국의 '권리의 장전 (Bill of Rights)' 이 근대적 정치혁명의 출발점으로 꼽히는 것이다.

민주정치의 발전이란 조직 중심부 (정부)에 대한 주변부 (시민) 의 권리를 강조해 온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가장 앞선 나라가 미국이다.

그러나 시민의 권리가 무조건 크기만 하면 좋은 일일까. 스티븐 홈즈와 캐스 선스틴의 '권리의 경제학' 은 이 문제를 따지는 책이다.

저자들은 권리를 중심으로 한 사회제도가 본질적으로 하나의 서비스산업이라는 측면을 지적한다.

서비스산업이기 때문에 비용이 든다.

이 비용은 대부분 세금으로 충당된다.

따라서 시민들이 많은 권리를 누리려면 세금을 많이 걷어야 하니, 권리의 범위는 그 사회의 경제사정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국방비는 시민의 권리를 외국세력의 침해로부터 지키는 비용이요, 사법비용은 국내 범죄자들로부터 시민의 권리를 지키는 비용이다.

미국은 양쪽을 합해 1년에 3천7백억 달러를 쓴다고 한다.

국민 1인당 1천5백달러 이상을 쓰는 셈이다.

1천5백달러. 제3세계에서는 여러명이 먹고 살 돈이 이 부자나라에서는 한 사람의 권리를 지키는 데 쓰이는 것이다.

권리는 통상 '소극적 권리' 와 '적극적 권리' 로 구분된다.

소극적 권리란 개인의 자유를 정부에게 침해받지 않는 권리이고 적극적 권리란 개인의 행복을 위해 정부의 도움을 받는 권리다.

중절수술의 금지 여부는 소극적 권리 문제이고 중절수술 비용의 지원 여부는 적극적 권리의 문제다.

미국의 보수파는 적극적 권리가 시민의 도덕적 해이를 가져온다는 이유로 축소를 주장한다.

공화당의 전통적인 '작은 정부' 주장이 이것이다.

반면 진보파는 적극적 권리가 국민의 도덕적 연대감을 뒷받침한다는 이유로 확장을 주장한다.

부자들에게서 많은 세금을 거둬 '위대한 사회' 를 만들자는 것이다.

소극적 권리가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인데 반해 적극적 권리가 민주주의의 확장을 위한 부가적 요소라는 데는 양자의 관점이 대개 일치한다.

저자들은 소극적 권리와 적극적 권리의 구분을 부정한다.

소극적 권리가 정부의 적극적 행위를 요구하지 않는 것 같지만 그 보장을 위해서는 사법장치의 운영 등 '집행비용' 이 든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적극적 권리와 연결된다는 것이다.

이 실용주의적 관점으로 본다면 한 사회의 인권 범위는 정치적 이념이 아니라 경제적 가치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나는 이 관점에 반대한다.

생존을 위한 필수품과 사치품의 구분 역시 그 경계선에서는 칼로 자르듯 분명치 않은 것이지만 양자의 개념은 엄연히 존재한다.

비용발생의 측면에 연속성이 있다고 해서 문명사회의 최소 기본인권과 복지사회의 '행복할 권리' 를 혼동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관점에 눈여겨 볼 측면도 있다.

구조조정의 고통 앞에 사회의 모든 섹터가 자기 '권리' 를 주장함에 있어서는 과연 우리 경제가 그 수준의 권리를 뒷받침해줄 만한 형편이 되는지를 한 번씩 돌이켜봄직하다.

김기협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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