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신문이여 너마저 - 신문의 날을 맞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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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H형,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이었으며 독립선언서를 기초했고 민주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던 제퍼슨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신문 없는 정부와 정부 없는 신문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면 한순간의 망설임 없이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할 것 입니다. " 신문의 역할을 강조한 제퍼슨의 말처럼 H형, 저 역시 정부와 신문 둘 중 어느 것 하나를 선택하라면

단연코 신문을 선택할 만큼 신문을 사랑하는 사람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이 민중계몽과 자주독립사상을 고취한 이래 신문이야말로 우리 민족을 지켜온 유일한 종교였습니다.

신문은 우매한 민족을 깨우쳤으며 반독재의 선두에서 분노했으며 불의를 보면 활화산처럼 일어서서 맨몸으로 돌격하던 자랑스러운 우리들의 척후병이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신문을 만든 H형과 같은 언론인들을 단순한 직업인으로 생각지 않고 정의의 사도 (使徒) 처럼 생각해 왔습니다.

이 사회는 온갖 부조리와 불합리로 뒤엉켜진 진흙탕과 같습니다.

오염된 사회의 무질서를 바로잡는 정화수야말로 바로 신문인 것입니다.

또한 오염된 대기와 강물들이 침전, 산화작용과 같은 현상으로 자정 (自淨) 되듯 사회를 정화시키는 최고의 필터야말로 저는 신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가 온갖 비리와 부패로 더럽혀져 있다고 하더라도 신문이 소금처럼 짠맛의 방부제 역할을 충분히 해준다면 사회는 그 어떤 오염에도 회복돼 건강을 되찾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H형, 따라서 지금까지의 독재자들이 채찍과 당근이라는 갖은 수법으로 언론인들을 길들이려 노력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후유증 때문인지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할 신문들이 점점 짠맛을 잃고 설탕의 역할을 하는 모습을 보고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어느 시대건 경쟁은 있게 마련이고 따라서 신문도 서로 경쟁을 피할 수 없겠지만 요즘처럼 신문들끼리 피를 흘리며 싸우던 때는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우리는 자기자신을 지나치게 자랑하는 사람을 경박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사의 풍모와 선비의 모습을 가졌던 신문들이 이제는 스스로 자기만이 최고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신문은 신문이 아니라 사보 (社報) 이며 돌려보는 회보 (會報) 와 다르지 않습니다.

또한 신문은 자기신문과 관련된 어떤 기업의 이익과 특정인의 선전을 대리하고 특수 계층에 정보를 독점하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신문은 사교계의 동정을 보도하는 동인지 (同人誌) 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독자들은 신문의 증면만이 독자에 대한 최대의 서비스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과다한 정보의 홍수로 신문은 '읽는 신문' 에서 '보는 신문' 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신문이 단지 보는 신문으로 돼 버릴 때 신문은 그날의 잡지가 돼 버릴 것입니다.

예전에 우리들은 신문을 읽었습니다.

신문기자의 이름을 외웠으며 사설은 물론 광고까지 읽었습니다.

그때 신문은 우리에게 살아 숨쉬는 생명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독자들은 신문을 읽지 않고 그냥 눈으로 훑어보고 있습니다.

항상 무엇이든 재미있게 지면을 채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신문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담당기자들은 1년에 한번씩 마치 술집에 나오는 얼굴마담처럼 금방금방 바뀌고 있습니다.

문화면만 하더라도 문학담당이 1년도 안돼 연극으로, 연극에서 영화로, 종교로, 음악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신세대의 젊은이를 겨냥한다는 미명하에 신문은 예전의 주간지와 여성잡지가 하던 일을 수용하면서 이를 혁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우리가 바라는 신문의 개혁은 신문 본래 역할로 충실히 돌아가는 일입니다.

이러한 강박관념은 이른바 신드롬현상을 초래합니다.

마치 크리스찬디오르의 상표처럼 신문은 심은하를 찍어대고, 모래시계를 만들어 내며, 쉬리를 만들어 댑니다.

신문은 이제 팔리는 것이면 무엇이든, 이를테면 학습지.스포츠.경제.주간지의 고유영역까지도 흡수해 껌에서부터 즉석라면.화장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갖춰 놓고 24시간 쉬지 않고 영업하는 체인점처럼 잡화상이 돼 버렸습니다.

H형, 신문이 이래서는 안됩니다.

이 사회는 점점 교묘한 거짓말의 논리로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 거짓의 정체를 밝히는 유일한 존재는 오직 신문뿐입니다.

TV가 공룡화돼 미친 광기에 젖어 있는 요즘 신문이야말로 우리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종교며, 정치가 거짓의 덫에 갇혀 있는 요즘 신문이야말로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정부인 것입니다.

로마의 정치가였던 카이사르는 가장 믿었던 브루투스의 칼에 맞고 암살당하며 이렇게 외칩니다.

"브루투스, 너마저" . 그렇습니다. 신문은 우리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들의 입에서 '신문이여 너마저' 라는 비명이 흘러나오게 해서는 안됩니다.

H형, 신문기자인 당신은 직업인이기전에 성직자입니다.

당신의 붓끝에서 정의의 섬광은 일어나고 당신의 붓끝에서 거짓은 가면을 벗습니다.

소금으로 돌아가십시오. H형, 소금은 자체로는 맛이 없으나 소금은 그 짠맛으로 우리의 영혼을 부패에서 지켜주지 않습니까. H형, 나는 H형을 신문기자로서 존경하며 신문기자로서 믿으며 신문기자로서 사랑하고 있습니다.

최인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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