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부부싸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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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미국 작가 오 헨리의 명작단편 '현자 (賢者) 의 선물' 은 젊은 부부가 각기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팔아 크리스마스 선물을 마련함으로써 서로간의 지극한 사랑을 확인한다는 내용이다.

아내는 길게 자란 아름다운 다갈색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 남편의 금시계 줄을 사고, 남편은 할아버지 때부터 물려받은 금시계를 팔아 아내의 머리핀을 사는 것이다.

부부간에 사랑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는 의미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성들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마치 정조와도 같이 소중하게 여긴다.

그래서인지 우리 역사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고려 의종 때의 일이다.

왕은 놀기를 좋아해 툭하면 큰 역사 (役事) 를 벌여 가난한 백성들을 동원했다.

먹지 않고서는 일을 할 수 없었으므로 백성들은 주먹밥일망정 준비해 와 점심을 때웠는데 한 역군은 그럴 형편도 못돼 매일 조금씩 얻어먹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날 아내는 다른 역군들과 나눠먹으라며 성찬 (盛饌) 을 마련했다.

집안에 쌀 한톨 없는 것을 아는 남편이 까닭을 물으니 아내는 머리수건을 풀었다.

까까머리였다.

남존여비니, 여필종부니 하는 차원에서의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아내에 대한 남편의 지극한 사랑이 아내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했다는 해석이 옳다.

사실 동양의 남성우월론자들이 자의 (恣意) 로 해석하는 '오륜 (五倫)' 가운데의 '부부유별 (夫婦有別)' 도 본래의 뜻은 '부부 사이에는 서로 침범하지 못할 인륜의 구별이 있음' 이다.

그것이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과 희생으로 오해되면서 오랜 세월동안 아내들에게는 '질곡 (桎梏) 의 세월' 이 되풀이돼 온 것이다.

지금은 물론 다르다.

아내들 뿐만 아니라 모든 여성의 지위는 몰라보게 향상됐고, 순종과 희생만이 아내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남편이 잘못을 저지르면 어떤 아내도 당당하게 맞선다.

옛날에는 참거나 눈감아주는 것이 남편에 대한 아내의 사랑일 수 있었으나 지금은 아니다.

그만큼 각박해졌다는 얘기도 된다.

그 까닭인지 서울시 소방본부 119구조 - 구급대의 지난해 한햇동안 부부싸움 출동 집계에 따르면 97년에 비해 사망.부상자도 크게 늘었을 뿐만 아니라 싸움의 내용도 훨씬 과격해졌다고 한다.

IMF구제금융사태 이후의 경제적인 어려움도 많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어려운 때일수록 부부간에는 사랑과 이해로 서로를 감싸주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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