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발칸] 테오 좀머 박사의 유고사태 긴급 진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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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코소보사태는 '시계 (視界) 제로' 인 채 인권과 국가주권의 상충관계를 극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인권을 위해서라면 남의 나라 내정에 간섭할 수 있는 것인가.

인권이 국가주권에 우선한다는 것은 보편적인 규범으로 뿌리를 내렸는가.

독일의 대표적인 언론인의 한 사람인 테오 좀머 박사와의 전화인터뷰로 코소보사태의 당장의 향방과 그것이 장기적으로 인권과 주권의 관계에 미칠 영향을 들었다.

[김영희 대기자 전화 회견]

김영희 = 코소보사태는 분명히 세르비아의 국내문제인데 북대서양조약기구 (나토)가 세르비아를 폭격하는 게 정당합니까.

좀머 = 나토의 군사행동은 인권이 국가주권에 우선한다는 원칙을 전제로 한 겁니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그게 국제법의 경향입니다.

金 = 군사행동의 목적이 밀로셰비치로 하여금 코소보평화안에 서명하게 하는 것이었다면 작전이 실패한 것 아닙니까.

좀머 = 밀로셰비치가 아직 굴복할 기미를 안보여 세르비아공화국이 랑부예 합의에 서명하고 코소보에서의 학살을 중지하도록 한다는 당초의 두 가지 목표는 아직 달성되지 않았어요. 코소보내의 세르비아군 집결지를 공격하는 제2단계 작전을 지켜봐야 하는데 그 결과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金 = 세르비아의 강력한 저항을 예기하지 못한 겁니까.

좀머 = 밀로셰비치는 위기에서 살아남는 강인한 힘을 가진 사람입니다.

거기다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의 경우를 보고 힘을 얻은 것 같아요. 미국이 이라크에 몇년째 미사일공격을 계속하지만 후세인은 건재하거든요. 밀로셰비치는 심지어 그의 독재에 반대하는 세르비아인들까지 자신을 지지하는 걸 보고 굴복할 생각을 않는 거죠.

金 = 군사행동에 대한 여론의 지지는 어느 정도입니까.

좀머 = 지금의 상황에서는 세르비아를 폭격할 수밖에 없다는 '마지 못한 동의' 정도지요.

金 = 이제 나토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좀머 = 나토는 폭격을, 세르비아는 인종청소를 중단하고 평화안을 외교적으로 다시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金 = 여론의 지지 없이, 최악의 경우 여론이 반대하는 상황에서 폭격을 계속할 수도 있습니까.

좀머 = 민주주의를 하는 사회에서 그건 안됩니다. 나토쪽 희생자가 늘고 시간이 더 흐르면 지지가 줄어들 겁니다. 주목할 게 한 가지 있어요. 밀로셰비치가 반격을 않는다는 거죠. 세르비아는 마케도니아에 집결해 있는 나토군을 공격할 수도 있고 보스니아에서 이슬람교도들을 괴롭힐 수도 있고, 나토의 '항공모함' 역할을 하는 이탈리아에 미사일공격을 가할 수도 있어요. 세르비아가 반격을 해오면 사태는 심각한데 아직은 그런 일이 없습니다.

金 = 계산된 자제 (自制) 라는 건가요.

좀머 = 밀로셰비치가 광적으로 행동하는 건지,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건지 그 마음을 읽을 수가 없어요.

金 = 지상군 투입 가능성은 있습니까.

좀머 = 그럴만한 군대가 없어요. 지상전투에서 이길 수 있는 규모의 군대를 갖추는 데는 몇달이 걸립니다.

그리고 여론이 반대할 겁니다.

金 = 사태가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까지 확대돼 발칸의 지역분쟁으로 확대될 위험은 없습니까.

좀머 = 밀로셰비치에게 달렸어요. 그가 반격을 하면 분쟁은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로 번지고, 터키와 그리스.불가리아까지 개입할지도 몰라요.

金 = 독일이 전후 처음으로 군사행동에 참가했는데 군사대국으로 등장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없습니까.

좀머 = 독일은 이제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한 것입니다.

독일은 군사대국이 아닙니다. 독일의 이번 작전 참가가 앞으로 나토의 역할을 결정하는 논의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봐요.

金 = 보편적인 인권이라는 개념의 등장으로 민족자결과 국가주권의 시대는 막을 내리는 겁니까.

좀머 = 우리는 민족자결의 시대가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를 옛 유고에서 목격하고 있어요.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슬로베니아는 모두 민족자결의 깃발을 들고 독립국가로 등장했어요. 그 과정에서 많은 희생을 치렀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국제법은 국가주권을 덜 중요하게 생각하고 인권을 훨씬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김 = 막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정치' 라는 유명한 책에서 윤리의 세계에서는 좋은 목적을 달성하는데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못한 수단이 사용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고 말했습니다. 선 (善) 은 반드시 선에서, 악은 악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그 반대의 경우가 많다는 지적입니다. 나토의 인도주의적 개입이 도덕적으로는 옳은 것이지만 그로 인해 인종청소가 재연되고, 결과적으로 알바니아계 사람들의 고통이 가중된다면 미국과 유럽 사람들에게는 심각한 도덕적 딜레마가 아닙니까.

좀머 = 군사행동을 취하는 데서 오는 도덕적 딜레마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만약 아무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면 또 다른 종류의 도덕적 딜레마에 빠질 겁니다.

베버가 지적한 것도 '깨끗한 손 (Clean hands)' 으로는 정치, 특히 국제정치를 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어떤 행동의 성공과 실패가 그 행동의 도덕성과 비도덕성을 사후 (事後)에 결정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걸 우리는 압니다.

그래서 나토의 작전이 성공해 밀로셰비치가 굴복하고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코소보로 돌아가고, 코소보가 독립국가로 재건된다면 이번 군사행동의 도덕성을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작전이 실패해 나토가 군사적으로 개입해 코소보 주민들에게 오히려 더 큰 고통을 준다면 심각한 도덕성의 논란이 예상됩니다.

金 = 94년에서 96년까지 러시아연방내 체첸자치주가 독립을 요구하면서 봉기했을 때 러시아는 5만명 정도의 체첸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습니다.

그때 서방세계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때의 수수방관과 이번 개입의 불균형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좀머 = 코소보는 우리 앞마당인데 체첸은 먼 고장입니다.

러시아는 핵무기를 가진 나라인데 세르비아는 핵무기를 가진 나라가 아닙니다. 체첸의 경우에도 개입할 도덕적 동기는 코소보의 경우에 못지 않았지만 체첸사태 개입은 대단히 위험했을 것입니다. 같은 이유로 아무도 티베트문제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인권을 위한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도 대상의 선택은 신중하고 제한적이어야 합니다.

金 = 철저한 현실외교군요.

좀머 = 베버도 지지할 현실정치 (Real politik) 라고 하겠지요.

金 =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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