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에 서서] '역사의 잣대' 다시 세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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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우리의 20세기 역사를 간단히 정의하면 굴욕의 경험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굴욕의 고난을 이겨내고 우월한 지배자의 사악한 동화정책에 맞서는 데는 스스로의 존재를 지탱해줄 수 있는 자존심이 분명 필요했다.

우리 민족이 우수한 민족이라는 것도 그래서 강조해야 했다.

우리가 지배자보다 더 긴 '반만년의 역사' 를 가졌다는 단순한 주장도 민족 우수성의 근거가 될 수 있었다.

당시 상황으로서는 의미있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해방이 돼도 이러한 경향은 달라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강화된 듯도 하다.

이민족의 지배와는 또다른 분단과 동란의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 아마 그랬을 것이다.

보다 철저한 자기성찰의 바탕 위에서 자신감의 기반을 확대해가는 것을 적극적 민족의식.문화의식이라고 한다면 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함으로써 자존심을 기르고 그것으로부터 힘을 얻어 내겠다는 주장은 방어적.저항적 민족의식.문화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학교 교실의 역사교육에서, 그리고 각종 전달매체의 역사해설에서 이같은 방어적 민족의식.문화의식은 팽배하고 있다.

지난 시절에는 그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할지라도 남과 더불어 세계사 창조에 튼튼한 자신감을 갖고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할 앞으로의 세기에도 이같은 방어적 시각이 견지돼도 좋을까? 그러한 시각, 그러한 의식으로도 어떤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튼튼한 민족의 자신감을 기를 수 있을까? 한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우리 근.현대사에는 피압박의 고난만 있지 남에게 불행되는 일은 전혀 하지 않았는가? 혹 했다면 우리는 그러한 것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앞으로 남이 그런 점을 지적하고 논란을 할 때 방어적.저항적 시각만 갖고 대응할 수 있을까?

우리가 주장하는 우수성의 모두가 남의 눈을 통해서도 검증될 수 있는 것인가? 일제 치하의 어린 시절, 큰 비밀이나 된듯 "일본 천황의 조상은 우리나라에서 갔단다" 고 일본인 선생의 눈을 피해 친구에게 몰래 속삭이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그것으로도 충분히 흐뭇했었다.

그러나 훗날, 유럽에선 다른 나라에서 왕가를 빌려오기도 하고 그런데도 지극히 존중받는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나의 그 흐뭇한 자랑의 기반은 적지 않게 흔들렸었다.

일본 고대문화는 우리 조상이 전해주었다는, 오늘날 여행상품으로까지 포장된 주장의 경우도 비슷하다.

일본인에게 강제연행된 도공들이 일본 도예문화를 꽃피웠다고 '자랑' 할 때, 왜 그것이 우리나라 아닌 일본이라는 땅에서 꽃피웠는가를 우리 자녀에게 가르쳐준 일이 있었는가? 우리 인쇄문화가 우수했다는 것도 역사교육에서 가르친다.

그러나 인쇄공예가 아닌 '인쇄문화' 로 일반화해 말하려면 인쇄문화란 서책의 대량 인쇄와 그로 인한 지식의 보급에 따른 지적 (또는 종교적) 변혁이라는 일반적 개념이 반드시 전제돼야 한다는 남의 눈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근래 비록 많지는 않으나 일부 뜻있는 일본 지식인들이 자기 나라가 과거에 저지른 죄악을 열성적으로 들춰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지난 날 일본의 자신감이 남의 눈의 검증을 견뎌내지 못하는 일방적인 것이었기에 그런 어리석음을 다시 범하지 않기 위해 발벗고 나서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 관한 보도를 접하고 "그러면 그렇지!" 하는 느낌 말고, "우리 같으면?" 하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일이 있는가?

나는 여러해 전 역사교육에 관한 한 국제회의에서 이렇게 말한 일이 있다.

"일본 사람이 그들의 교실에서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가 일본 근대화에 끼친 업적에 대해 배우는 것은 필요하고 당연하다.

그러나 그가 안중근 (安重根) 이라는 이웃나라 지사에게 왜 피살됐는가를 배우지 못한 채 관광객으로 방한해 남산에서 비로소 안중근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들은 그때까지 배운 교실에서의 역사교육을 전면적으로 불신해 버릴지도 모른다" 고.

우리에게도 우리 역사교육을 전면적으로 불신해 버릴 위험은 없는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최근 신선한 충격을 주는 보도에 접했다.

우리나라 정부가 정주 (定住) 외국인에게 참정권을 줄 것이라는 것이다.

지난 날 재일동포 참정권 문제를 보도하는 언론의 태도는 재일동포 문제의 특수성이 받아야 할 당연한 보상이라는 것 이상으로 나간 일이 없었다.

재일동포 문제라는 특수한 문제를, 남의 눈도 감당할 만한 일반적 문제로 환원하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부가 진일보한 것이다.

이같은 일반성에 근거한 특수성 (재일동포) 문제의 해결 (참정권 요구) 이야말로 21세기 방식이라 할 것이다.

민두기 역사학자.서울대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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