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급공사에 '전관예우' 퇴직자 몸값 치솟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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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한 지방국토관리청 과장 (사무관) 이던 Q씨. 그는 퇴직을 앞둔 지난해 말 설계.감리 용역회사 5곳으로부터 동시에 임원급 자리를 제의받았다.

여비서가 딸린 개인 사무실과 고급 승용차, 공무원 시절의 몇배나 되는 연봉은 기본조건이고 관급 (官給) 공사 설계입찰을 따낼 때마다 계약비의 일정 비율을 성과급으로 주겠다는 파격적 제의도 있었다.

그는 그 중 한 곳에서 화려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동종업체인 S엔지니어링사의 고위 간부는 Q씨 사례를 "전관 (前官) 없이는 관급공사를 따낼 수 없기 때문" 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우리 역시 살기 위해 전관 스카우트에 나섰다" 며 "1억원이라도 줄 수 있으니 한 사람 소개해 달라" 고 하소연까지 했다.

정부 구조조정을 앞두고 경제.건설 관련 부처의 전직 및 퇴직 예상 관료를 대상으로 영입 열풍이 불고 있다.

특히 도로.항만 등 연간 10조원이 넘는 공사를 발주하는 건설교통부 쪽이 극성스럽다.

퇴직 공무원들은 근무했던 부처 내의 끈끈한 인맥과 풍부한 정보, 그리고 사실상 '전관을 예우하는' 입찰 규정 때문에 예전부터 입찰 전선에서 가장 확실한 무기로 여겨져왔다.

여기에 경제위기 이후 공사물량이 감소하고 지난 2일 규제개혁 차원에서 입찰제한 규정이 완화 (건설기술관리법 시행규칙 13조) 돼 경쟁이 심해지면서 활용가치가 더욱 커진 것이다.

이에 따라 '관업 (官業) 유착' 과 그로 인한 불공정 입찰→부실공사의 악순환이 심화될 가능성이 크다.

스카우트 바람은 정부부처 구조조정 문제가 제기된 지난해에 일기 시작했다.

공사발주가 잦은 건교부 산하 기관.철도청 등과 설계.감리를 맡는 엔지니어링 업계 사이에서 더 심하다.

건교부 모 국장은 "누가 퇴직한다는 소문만 나면 금세 업체들이 그를 붙잡으려고 다툰다" 며 "몸값 1억원쯤은 기본" 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건교부와 지방국토관리청 출신 공무원 중 퇴직 후 엔지니어링 회사로 자리를 옮긴 사람만도 20여명. 도로공사도 지난해 이후 퇴직한 90여명의 부장급 이상 간부 중 상당수가 같은 코스를 밟았다.

1급 (처장급) 과 2급 (지사장급) 10여명도 포함됐다.

이들의 '값어치' 는 최근 정부 발주 공사 낙찰실적을 보면 확연해진다.

주요 지방국토관리청장을 거친 C씨를 지난해 7월 영입한 K건설은 곧바로 서울국토관리청으로부터 두 건의 설계입찰을 따내는 등 연말까지 4건 27억여원의 수주 실적을 올렸다.

일반 부처 4급 이상은 퇴직 후 2년간 관련 업계 취업을 못하도록 한 공직자윤리법에도 불구하고 2급이었던 그는 퇴직 한달 만에 고문이란 직책으로 K사에 발을 들여놓았다.

석달 먼저 도로공사 처장 (1급) 출신을 데려간 N엔지니어링 역시 도공이 발주한 10억원 이상의 굵직한 공사 3건을 잇따라 따내 최고의 실적을 올렸다.

"이런 풍토 때문에 공사 예정가의 사전유출 등 고전적 비리의 소지가 상존한다" 고 관계자들은 말한다.

입찰과정에 발주처의 재량권이 지나치게 많은 것도 부조리를 키우는 여건이라는 지적이다.

소위 '신기술 적용' 을 이유로 특정 업체에만 응찰자격을 주는 사실상 수의계약 형태도 성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유착을 막는다는 취지로 93년 공직자윤리법에 명시한 '재직분야 취업제한' 조항조차 적용 대상을 좁혀놓아 효과가 작다고 이들은 지적한다.

국회 건교위 송현섭 (宋鉉燮.국민회의) 의원은 "건설의 첫 단추인 입찰과정이 잘못되면 결과는 당연히 부실시공이나 고가 (高價) 낙찰 등으로 나타나고, 결국 국민이 피해를 본다.

제도의 보완이 시급하다" 고 강조했다.

기획취재팀 = 김석현.신동재.강갑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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